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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서봉은 군대라는 매개체를 통해 세계 밖으로 유배된 것들을 호명하고자 한다. 그에게 군대는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그의 군대는 “늙은 군대”이며, 그것은 “저녁의 추억”이며 “누렁이가 지키는 놋쇠그릇의 둥근 상처 같은” 것이다.

 

나의 늙은 군대는, 사람들 가끔씩 올려다보는 저녁의 추억,

그 추억을 일시에 점령하는 붉은 구름의 영혼 같은 거

착한 상인들을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저녁의 셔터음처럼

드르르륵 발사되는 단호한 외침 같은 거

 

나의 군대는, 수명을 모르는 빈 마당의 촉수 낮은 전구와

그 전구가 지배하는 평상의 낡은 네모와

네모가 만들어내는 엄격한 그림자에 놀라 커엉컹 짓는

개 한 마리, 누렁이가 지키는 놋쇠그릇의 둥근 상처 같은 거

 

-천서봉 「나의 늙은군대는 -시의 나라」부분

 

시인에게 시는 더 이상 힘의 표상일 수 없다. 그래서 그의 군대는 더 이상 군대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시인에게 시의 세계는 애초의 모든 힘의 원천이자 삶의 근거였을 것이다. 시인이 가치를 두는 것은 시의 세계이며, 그것이야말로 우리 삶을 보듬고 이끌어주는 것라고 시인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힘을 잃고 소멸에 이르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슬프고 쓸쓸하다고 말하고 있다.

 

후회스러운 것은 때때로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거

점호 나팔 혹은 그 소리를 닮은 노트에 적힌 긴 주어들을

자꾸만 잃어버렸으므로, 달큰한 잠이 조금씩 회군하던

내 머릿속 위태한 연안으로부터의 어떤 망명-

 

그리하여 홀로 남겨진 외로운 抒情의 가치가

시월의 빽빽한 숲 속으로 우리를 이끌었다는 거

 

그러나 나의 늙은 군대는, 그 숲의 백양나무처럼 서서

낡은 고독을 기억하고 고독의 처음 느낀 입술을 기억하네

언제든 불러 모을 수 있는 이 가난하고 슬픈 기운들,

나는 지금 노을 지는 쪽에 자리 잡은 어떤 작고 오래된 제국을 보네

 

-천서봉 「나의 늙은군대는 -시의 나라」부분

 

천서봉은 시를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호명한다. 그럼으로써 우리 삶이 잃어버린 보다 근본적인 것들을 환기하는데, 그러나 시인이 호명하고자 하는 것들은 “위태로운 연안으로부터의 어떤 망명”이나 “시월의 빽빽한 숲”에 놓임으로써 소명에 이르는 운명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낡은 고독”과 “고독의 처음 느낀 입술”을 기억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시인은 그것을 “가난하고 슬픈 기운”이라고 말한다. 직설적인 화법을 통해 나타나는 시인의 발언은 우리 삶이 잃어버린 것이라는 모호함과 결합하여 오히려 구체적 상징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시인은 이 모든 것들을 “노을 지는 쪽에 자리 잡은 어떤 오래된 제국”으로 인식한다. 시인이 보여주는 “제국”과 “군대”는 보편적으로 인지되는 폭력과 부정의 상징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언젠가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던, 그러나 이제는 힘을 잃어버린 시의 세계이자 우리가 꿈꾸어 왔던 세계로부터의 망명인 것이다. 시인은 잃어버린 세계를 호명함으로써 그것의 복원을 간절히, 그러나 쓸쓸히 꿈꿈고 있다.

 

 

『시인시각』 2011년 겨울호 ㅣ 조동범 시인

 

 

[단상]

이 모든 것은 다 찬란한 빛이다 그리고 빚이다.

사람이라면, 빚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집을 내고나서야 시 쓰는 일이 빚을 만드는 것임을 알았다.

더 외롭겠지만,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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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악하악 숨을 몰아쉬어본다. 여전히 가슴이 답답하다. 이 체증은 도무지 내려갈 기색이 없다.

 

『서봉氏의 가방』은 어느덧 생의 바늘이 오후로 넘어가는 독자에게 저녁의 쓸쓸함에 충분히 젖어보라고 권한다.

 

시작부터 “몸은 작고 내부는 두터”운(「문고판 하이틴 로맨스-주원에게」) 시집 『서봉氏의 가방』은 한 권의 절망이다. 낡음의 어휘들이 넘친다. “아들은 고작 아비가 되”(「뿌리내리는 아버지」)기 위해 ‘휘청거리’고, ‘흔들’리고 ‘늙어’가, “허파꽈리처럼 웅크”(「바람의 목회」)린다. ‘가건물촌의 동거’처럼 ‘실낱같은 금들’(「플라시보 당신」)을 키웠을 뿐, 결국 ‘절망들이 마중 나와 있’는 (「불심검문」) 정류장에 서 있다는 걸 깨닫는다.

 

『서봉씨의 가방』은 책의 표지처럼 우울하다. 낡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고뇌의 빛깔이다. 끊임없이 담금질하고 연마하여 “아주 탱탱한 풍선을 타고 하늘에 닿는 꿈”(「플라시보 당신」)에 부풀어 들었던 새 가방은 세상의 바람들과 만나 헛된 곳을 다니기도 했고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면서 시나브로 낡아버렸고 쓸쓸해졌고 그나마 담겨있던 약간의 희망조차 수시로 쏟아버리고 말았다. 내가 그동안 가방에 집어넣은 시간들은 어디로 갔을까? “서봉氏의 바깥으로 규정된 실체”(「서봉氏의 가방」)인 현실과 관념 속에 존재하는 자아를 한 가방 안에 잘 개켜 넣을 수는 과연 없는 것일까?

 

어느 곳을 열어도 “고단한 주어들이 부드럽고 아픈 묘혈 짓는”(「폭설」) 책갈피 마다 ‘잔돌처럼 쓸쓸’(「서봉氏의 가방」)한 당신이 보인다.

 

당신이 고개 떨구고 막막하게 서 있는 오후, 시인의 문장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가슴의 체증이 내려가기를 기다리는 독자가 있다. 도무지 먹먹함으로 가득 찬 저녁은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시사사  2012년 3-4월호  ㅣ  염혜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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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서봉]습관들

 

 

1.

모래를 씹으며 당신을 생각한다

 

잠깐이지만 아직도 이 별에는 꽃들이 지고 핀다

 

어느 순간에는 귀가 커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불행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내가 내게로 불려와 무릎을 꿇는 밤에는 순리(順理)처럼 무책임한 단어가 없다

 

모를 일이지만 그건 꽃들 스스로도 고백할 슬픔이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당신을 생각하면 모래가 씹혔던 것인데

 

지금의 나는 모래를 먼저 씹는다 입은 귀가 없어서 내 말을 귀담아 듣지 못하고

 

2.

폭식 후에 구토, 수렴 후의 발산, 코기토 후의 숨, 그리고 마침내 긴 한숨

 

3.

이제 가끔은 모래를 씹어도 당신이 오지 않는다 슬프지만

 

어렵지 않다 이 문장은, 무언가 이상한데 모르게 자연스럽다

 

그저 꽃 질 때까지 봄이 오지 않은 것이라 쓰자 꽃과 봄이 그러하듯

 

당신과 모래의 관계에 대하여 나는 별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무랍 던지듯, 또 사막까지 걸어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발견 웹진 ㅣ 2012년 봄호


[단상]

변화를 여기하는 힘이 자의든 타의든

모든 책임은 내게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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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니 참 이상한 프로젝트도 하게된다
중국 사람들은 여전히 근세시대의 건축풍을 좋아한다하니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우리 사는 일이 뭐 별거 있나 싶다가도
내가 살아가는 이 일상이 이렇게나 초라하게 저물어도 되겠나 싶고
그 중에서도 참 부질없이
지었다 허물고 또 지었다 허무는 시나 건축에 세들어사는 내가
이른 봄처럼 흉흉하다

오늘은 카트에 넣어둔 시집 몇 권과 추리소설 몇 권을 결제하고
저녁에는 지인들을 만나 오랜만에 당구장에도 들러야겠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가고싶은 곳이 있으면 가보자
만나고 싶은 사람은 만나고 보낼 사람은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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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멀젼 리프트했던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스캔한다
겨우내 사진을 잊고 살았다
좋은 시들을 읽었지만 곧 잊어버렸다

봄인가
봄엔 당신 마음도 좀 누그러지려나
사랑이 이 지구에서 그래도 가치가 좀 있다치면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걸 자꾸 잊는다
불변과 가변 사이 내가 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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