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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면도를 위한 에스키스

#102_[천서봉] 66/100

 

 

 

꿈을 꾸었다 관음의 꿈이었다

 

신형철의 글을 읽었다 신형철은 과연

제2의 김광남이라 부를만하다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지식의 재해석이고

피해야할 것은 관념이 아니라 관념의 명징성이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은 말이지만 책을 덮으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또 꿈을 꾸겠지 하지만

씻어도 씻어도 사람은 깨끗해지지 않을 것이다

 

 

 

[천서봉] 66/100_나의 시 나의 시론

 

 

#_002

그것의 일부는 저것의 일부다. 나의 왼편은 당신의 오른편이다. 모든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_003

오전이 사라진 일요일이 계속되고, 당신은 몰라보게 쑥쑥 자라나고, 수염만큼이나 거친 눈빛의 내가 라면을 사러가는, 가령 그런 장면, 시는 형태가 사라진 이미지, 혹은 이미지마저 사라지고 난 뒤의 어떤 형태. 시는 도돌이표.

 

#_004

2월에는, 비냡스키의 음악을 들을 것. 밤거리에 고해하지 말 것. 왜 사냐고 묻지 말 것. 대신 왜 살지 않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을 것. 구글어스에서 꼭 푸나를 찾아볼 것. 폰에서 지워야할 사람을 지울 것. 지워야 할 사람들을 지우고 버스를 탈 것. 2월을 넘기기 전에 꼭 한 번은 2월을 그리워 할 것. 짧아서 아름다웠던 것들을 찾아볼 것. 시에게도 가끔은 물을 줄 것.

 

#_007

가장 아름다웠던 한때의 꽃 같은 당신을 버리고 나는 무엇을 얻었을까. 너무 가까워서 읽을 수 없던 문장들. 상황이 모두 종료된 후에 도착한다. 당신도, 시도.

 

#_008

나를 벗어나고 싶어서 도망가듯 시작한 일들은 내가 도망한 가장 먼 곳에 내가 있음을 알게 한다. 먼 당신이 실은 나와 가장 가까이 있었듯이. 어쩌면 그것이 시의 맹점이자 매력이다.

 

#_009

진아에게_Atman, 라는 제목의 시를 삼 년간 쓰고 있다. 아버지, 저는 여전히 여기 혼자입니다.

 

#_011

나무_되기, 고등어_되기, 성냥팔이 소녀_되기, 창녀_되기, 시인_되기, 그건 모두 같은 종류. 우리는 결국 같은 종류의 폐허를 간직하고 있다는 거다.

 

#_013

나무는 바람을 초월하지 않는다. 거울은 대상을 초월하지 않는다. 세헤라자데는 죽음을 초월하지 않는다. 죽음은 소멸을 초월하지 않는다.

 

#_014

국적과 성별, 나이를 불문하는 나라의 일원이고 싶다. 차별이 평등이고 평등이 차별인 나라, 은수자隱修者가 없는 나라, 시는 반성하지 않을 것이며 구원을 꿈꾸지 아니할 것이다.

 

#_015

당신이 계신 곳에도 봄이 오고 있는지요? 당신에 대한 나의 기색氣色은 근처 단풍나무에 넣어두겠습니다.

 

#_016

끊임없이 어디론가 가야한다는 이 강박은 언제 아름다울까.

끊임없이 변화해야만 하는 내 시들은 언제 아름다울까.

 

#_018

노란 점, 검은 배경, 노란 손수건, 검은 턴테이블, 노란 꽃, 검은 뿌리, 노란 신호등, 검은 잠, 노란 연애, 검은 신음, 노란 목마, 검은 저녁, 노란 동전, 검은 아이스크림, 노란 계단, 검은 구멍, 노란 달, 검은 그림자, 노란 옥수수, 검은 피리, 노란 은행잎, 검은 연대, 노란 단무지, 검은 김밥, 노란 음표, 노상의 검은 악단, 노란 촛불, 검은 흔들림, 노란 구토, 검은 주검, 노란 돌발성, 검은 모독, 그리고 면회에서 돌아오는 길, 버스의 둥근 번호판, 나를 싣고 가는 비걱 비걱, 바퀴들의 슬픈 악다구니. 노란, 당신.

 

#_019

그럴 수 있는 건 언제든 그럴 수 없다. 그럴 수 없는 것은 언제든 그럴 수 있다. 가령, 적도에 내리는 눈, 그런 일들을 분명 누군가는 목도할 것이다. 함부로 장담하자.

 

#_021

시는 음악이다. 음악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여기저기서 울고 있겠는가. 때로 시는 아크로니.

 

#_022

후두둑, 고양이 울음소리, 비가 내닫는 소리, 고양이 비, 비 고양이, 내가 더해지는 소리.

 

#_023

어딘가, 내가 없는 곳에 두고 온 내가 아프다. 환상통처럼, 그것은 부재로서 실존한다. 새벽, 이불 밖으로 나가 있는 한 쪽 발의 서늘함을 느끼면서 시는 겨우 어떤 단서를 마련한다.

 

#_024

복수複數의 타자성은 극복되어야할 대상이 아니다. 표상들이 부딪는 양가야말로 시인과 시를 연결하는 매개체이며 시를 탄생시키는 동력이다.

 

#_025

다시 생각해도 시는 거울이지만, 시는 대체로 삶, 혹은 시간과 분리되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삶은 부재를 통한 경험적 깨달음이고 시는 경험적 부재를 되짚어가는 환상적 실재다.

 

#_026

추억도 썩는구나, 무덤에서 다시 당신을 발굴해내는 나.

 

#_027

시가 조금씩 나를 앗아가고 있다. 그 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세상이 앗아가고 있다. 시는 그런 것이다. 애초부터 시는 구원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던 것이다.

 

#_028

쪼르륵 쪼르륵, 새벽에 오줌을 누다가 나는 상징이 존재하던 날들을 그리워했다.

 

#_029

시가 바람에 흔들린다. 벽돌을 놓아 눌러놓는다. 펄럭이던 소리를 시가 견딘다. 서로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나와 시가 서로 견딘다.

 

#_031

정지용의 시정신을 되새겨 본다면 시에서의 육화肉化는 논법상 귀납적인 것일 수 있겠다. 독서가 내게 구심점으로의 수렴을 요구한다면 사진은 내게 상상력으로 발산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시와 사진은 극과 극에 놓여있는 제법 잘 어울리는 친구다.

 

#_032

관념은 구체화되어야 하고 사물은 정신을 얻어야겠지만 그러나 꼭 그것이 바른 길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강박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일종의 강박이 내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_033

보상에 타협할 수 없어 집을 잃고 강제 퇴거된 사람을 알고 있다. 무능하게도 나는 집을 짓기만 하고 잘 허물 줄을 모른다. 그런데 나의 길이 왜 그와는 점점 멀어지는 길이라는 생각이 드는가. 이 좌절감은 왜 시를 허물 때의 감정과 닮았는가.

 

#_034

나도 사람이라고, 12월에는 행복해지고 싶었다.

 

#_037

시를 신는다. 시를 입는다. 시를 먹는다. 시를 씹는다. 시는 어디에 놓아도 좋다. 어디에 놓아두어도 어울린다. 시는 비어있는 것. 어차피 시는 결핍 아닌가.

 

#_038

결핍이 나를 증명하는 것이다.

 

#_039

결국, 결핍이 나를 증명하는 것이다. 나를 둘러싼 우주적 배치에서도 그러하고 내 안에 놓인 소우주에서도 또한 그러하다. 여전히 의문인 것은 결핍을 채워가려는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물리적 성질이 과연 인간에게 적용되어도 좋은가?

 

#_040

인간이라는 말을 쓸 때마다 조심스럽다. 인간이라는 말을 쓰는 일은 이미 인간을 인간 외의 다른 것과 분리하는 권력적 시선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람이 분다. 시가 분다.

 

#_043

한 가지 일을 십 년 이상 한다는 것은 자신감이나 열정이 없이는 불가한 것이나 시만은 예외로 두겠다. 비가 올 때 우산이 없는 마음으로 사랑이 올 때 사랑을 모르는 마음으로.

 

#_044

서정이나 서정과 대립되는 단어들(가령 반서정, 환상, 심지어 잔혹까지)이 손에 쥔 패처럼 사용되지 않았으면 한다. 별은 다 각자 빛나는 것이니까.

 

#_045

부디 더 많은 약속을 깨고, 부디 더 많은 부정을 긍정하기.

 

#_046

나는 멸종되어가는 본질을 생각한다. 식물이 식물성을, 동물이 동물성을 잃어버릴 때 그것들은 자의든 타의든 멸종해 갈 것이다. 시에게는 더 버릴 서정이 남아있긴한가? 슬픔이 슬픔을 버리는 일, 그건 또 얼마가 슬픈가.

 

#_047

시가 괴물이 되어가는 것은 일종의 멸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여기서의 멸종은 시가 아닌 자아의 멸종이다. 자기 분열적 번식은 감성과 감상을 구분 못하는 일종의 자아 병증이다. 멸종을 면하려면 새로운 사랑을 찾아야한다. 그러므로 변하지 않는 사랑 또한 괴물이다. 먼 미래의 내 것은 지금 내게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시에게 정중한 동의를 구하는 바.

 

#_048

아름다움이란 끝내 주관적인 것이다. 시는 문학에 가까운가, 미학에 가까운가. 내가 신봉하던 바람은 문학인가 미학인가.

 

#_049

내가 살던 유년이 아직도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시월엔 따뜻한 사과의 씨방 속에서, 유월엔 바람이 사라지는 어느 틈에서, 내가 모르게, 나만 모르게 그들이 그들만의 살림을 꾸려가고 있을 것만 같다. <시가 보여주는 것은 사라짐의 외양>이라고 말한 것은 블랑쇼던가.

 

#_050

「1659년, 고라니 혹은 사슴」이라는 시를 쓰다가 나는 내가 조선시대에도 시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을 견디거나 참는 일, 때론 그것이 상상력이다.

 

#_051

조선시대에도 내가 시인이었던 것은 현생에서도 부족한 도덕성 때문이었다고 확신한다. 그 확신이 시를 쓴다고 나는 다시금 확신한다. 이것은 비관도 아니고 비판도 아니다. <나는 차라리 박인환을 더 사랑합니다> 라고 말 할 때 주변에 울려 퍼지는 공명, 혹은 그 뒤의 침묵 같은 것이다.

 

#_052

누구는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누구는 내리는 비의 사이를 본다.

누구는 내리는 비만 바라보고 누구는 내리는 비의 사이만 본다.

 

#_053

나는 내리는 비만 바라보고 너는 내리는 비의 사이만 본다.

 

#_054

나는 뼛속까지 회색, 시는 뼛속까지 미완성

 

#_055

당신이제게주신맑시즘엔곰팡이슬었네요잉곳[鑄塊]같은정신은맑지않네요때로사랑도병든이념만같아서당신새해복많이받으세요

 

#_058

붕괴를 불러올 만큼의 하중이 아니었음에도 무너지는 거, 그러니까 피로하중이라는 거 말이지. 어떤 콘크리트 부재, 우리의 어깨, 떨어지는 꽃들, 당신, 그리고 나, 시는 피로해.

 

#_064

겉장을 펼치면 따뜻한 물이 흘러나오는 그런 시집은 없나요?

 

#_065

실패한 혁명의 문을 열면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는 그런 소설은?

 

#_069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뾰족하게 닫히는 시. 논리는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도태되는 것이 옳다. 논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 떠날 수 있게.

 

#_072

어찌되었건 삶은 스투디움, 시는 푼크툼. 시집은 변기便器.

 

#_073

마당을 바람에게 돌려주고 부재를 시에게 돌려주고. 사바사바 분신삽아分身揷我 목요神에게 비나니, 나는 한 마리 고등어로 변신.

 

#_074

당신은 일요일까지 살자했고 나는 목요일에 만나자고 했지, 우리를 닮아 시는 그렇게 실존적으로 방황한다.

 

#_075

발아는 발화와 같은 뜻이다.

 

#_077

아주 구체적인 구름과 시사성을 지닌 나무가 자라는 곳이 있다면 아마 나는 그곳에서 내 슬픔을 팔며 살아갈 것이다.

 

#_078

당신이 연거푸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울진에 있었다. 울진에서 아픈 허리를 뒤척이며 옆에 없는 당신을 생각했고 바람을 만들어내는 나무를 생각했고 그리고 그 나무처럼 조금 울었다.

 

#_080

시 쓰기는 단미斷尾, 문자의 꼬리를 자르는 일. 의미 없음에 무의미로 대응하는 폭력, 우울하다. 그 폭력에 의해 해체되는 자아, 그래서 더욱 우울하다. 해체된 자아의 선택적 취사는 가능한가? 그건 시의 바깥이어서 더더욱 우울하다.

 

#_082

지금을 멀리 보내기 위해 내가 버티듯 당신도 버티고 있을 것을 안다.

 

#_083

내 시는 수만 장의 나뭇잎처럼 자잘할 것. 그리하여 끝끝내 당신으로부터 버려질 것.

 

#_084

망종이었다. 미칠 것 같다는 당신의 전화를 받고 나는 지금 밥을 먹는 중이니 나중에 통화하자 했다. 땀을 흘리며 건너다 본 창밖으로 노을이 날아가고 있었다.

 

#_087

사람들은 시인이 문장을 지배하거나 문자를 주무른다고 생각할 테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시인은 그저 문자의 본령을 따라 방황할 뿐이다.

 

#_088

방황의 길은 관념적이어도 좋고 이미지화 되어도 좋다. 동선이 정해지면 어디로든 걷는다. 여행은 두 종류가 있다 끝이 정해진 여행과 정해지지 않은 여행, 이것은 지극히 취향적인 것이지만 나는 끝이 정해지지 않은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내 시가 수난을 겪는 이유다.

 

#_090

1번 나무가 1번 미용사 앞에 가서 앉는다. 어머, 새집

2번 나무가 2번 미용사 앞에 가서 앉는다. 가을이니까, 붉게

3번 나무인 나는 대기석에서 윌리엄 브레이크의 <이혼수첩>을 읽는다.

 

#_091

철야를 하다가 창밖으로 바라보는 역삼동엔 새벽 두 시가 되어도 저녁 시간처럼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여기 이 동네엔 몸이 아픈 사람들이 많은지, 안마시술소가 성업이다. 그리고 잠깐, 나는 나로 인해 마음이 아팠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_093

나의 낭만적 패배사는 언제쯤 과거로 기록될 수 있을까.

 

#_094

늘 그랬다. 숲 속에서 그랬고 이불 속에서 그랬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그랬고 우크바르에서도 그랬다. 늘 그랬다. 나도, 당신도.

 

#_096

선거의 뒤, 이제 각자의 몫을 견디고 각자의 민주주의를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만이 남았다. 나의 가난과 시와 신파를 나는 어떻게든 책임져야 한다.

 

#_099

시는 바람의 소비자, 시는 유령의 생산자.

 

#_100

방으로 들어가는 세 개의 문이 있다고 치자. 즐거운 방, 쓸쓸한 방, 즐겁고 쓸쓸한 방, 내가 어느 방의 문을 열었을지 맞추었다면 거기서 만나 고기나 굽자 당신이여.

 

 

 

 

 

『현대시학』ㅣ 2013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