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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_두 번째 시집_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 천서봉 시인의 두번째 시집. 첫 시집이 주로 ‘당신’으로 표상되는 애인, 아버지, 어머니, 또다른 자아와 화자 ‘나’의 이자관계에서 오는 사랑과 슬픔의 정서를 그렸다면, 이번 시집은 이미 www.aladin.co.kr [천서봉] 목요일 혹은 고등어 -가령, 사람만한 고등어 두 마리가 카페에 마주 앉아있는 그런 풍경, 사람들은 그 신기한 풍경에 놀라 사진을 찍어대고 둘은 아랑곳없이 서로의 대화를 이어가는, 그런 목요일 몸에서 물이 흘러 바닥을 적시듯 그렇게 만납시다 사탕이 잔뜩 묻은 궐련을 쥐고 수요일은 이르고 금요일은 조금 늦고, 그러니 목요일쯤 만납시다 새벽이 고인 사발을 들고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우리가 너무 늙어있을 터이니, 그러니 목요일쯤 만납시다 어제까지의.. 더보기
#123_[천서봉] 시를 읽는 몇 가지 이유 [천서봉] 시를 읽는 몇 가지 이유 겨울 다음에 봄이 오기로 한 지구의 약속 때문이다 친구처럼 건너오는 비의 목소리, 잘 있었니 社會는 여전히 도착하지 않은 운명을 두려워하고 그래 그래 네가 돌아오지 않는 일만이 우리를 유효하게 만들지 어떤 규칙들을 어기면서 나는 비로소 나를 떠올린다 소독을 알리는 스피커, 벌레보다는 소문이 더 무서운데 아저씨, 네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 창밖 나무들은 혁명처럼 서 있다 상인들이 불빛을 꺼내드는 저녁에는 그나마 그 불빛 아래 숨을 수 있다 똑똑똑 수도꼭지로부터 고독이 떨어지고 일부러 조금 열어둔 것처럼 마음 들키고 싶을 때 다시 봄은 온다 여전히 하찮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거울 때문이다 『문학선』ㅣ 2017년 겨울호 [단상] 정선 누나, 지호 누나, 전영관.. 더보기
#122_[천서봉] 플라시보 당신 [천서봉] 플라시보 당신 저녁이 어두워서 분홍과 연두를 착오하고 외롭다는 걸 괴롭다고 잘 못 적었습니다 그깟 시 몇 편 읽느라 약이 는다고 고백 뒤에도 여전히 알알의 고백이 남는다고 어두워서 당신은 스위치를 더듬듯 다시 아픈 위를 쓰다듬고, 당신을 가졌다고도 잃었다고도 말 못하겠는 건 지는 꽃들의 미필이라고 색색의 어지럼들이 저녁 속으로 문병 다녀갑니다 한 발 다가서면 또 한 발 도망간다던 당신 걱정처럼 참 새카맣게 저녁은 어두워지고 뒤를 따라 어두워진 우리가 나와 당신을 조금씩 착오할 때 세상에는 바꾸고 싶지 않은 슬픔도 있다고 일기에 적었습니다 『현대시』ㅣ 2015년 6월호 [단상] 더불어 발표한지 꽤 되는 시 한 편을 연이어 올려둔다 그러고 보면 나는 바꾸고 싶지 않은 슬픔들을 꽤 많이 갖고 있다 더보기
#121_[천서봉] 나무 호텔 [천서봉] 나무 호텔 그러므로 나는 오늘 지루한 사막을 가득 메운 모래가 아니다 백자의 비명, 귀가 자라 작년의 소리를 듣는 나는 그러나 로비가 아니다 잘 지내느냐고, 차마 물어볼 수 없는 낙엽의 손끝은 나이테가 아니다 객실은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둔 무기력이 아니며, 혹은 끝없이 자라나는 허공도 아니다 일단 새들은 내가 아니다 바람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심정으로 나는 나무 꼭대기에 걸린 단 하나의 죄에 대해 읍소했지만, 사실 그것도 詩는 아니었다 그러나 저기서 하룻밤 묵어가는 별이 미쳐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므로 너무 작아서 너에게 가 닿지 못한 내 목소리가 내일의 모래는 아니다 나무 호텔은 나무도 아니고 호텔도 아니다 아닌 것들의 밤이 넓고 유순하다 『천년의 시작』ㅣ 2017년 겨울호 [단상] 정말 .. 더보기
#120_코엑스 메가박스 영상시 2015년 7월 한달간 코엑스의 메가박스 영화관에서 영화시작전 상영되고 있는 영상시 더보기
#119_2015년 2월 어느날, 천서봉 새해 들어서 최근의 한 달을 나는 마치 몇 달처럼, 아니 일년처럼 지나고 있는 중이다 사람은 누구나 변해야하고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나는 지금 그 시절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만드는 이 하찮은 회사가 언젠가 많은 사람이 아름다운 꿈을 키울 수 있는 곳이 되길 바란다 새로운 시작이지만 언제나처럼 내 마음은 늘 마지막 같기를 마지막 만남처럼 슬프고 괴롭기를 -봉 더보기
#118_코엑스 메가박스 영상시 12월 한달간 코엑스의 메가박스 영화관에서 영화시작전 상영되고 있는 영상시 더보기
#117_[천서봉] 있는 힘껏 당신 포토 에세이집 『있는 힘껏 당신』이 나왔다 사진과 글들이 낯설만큼 한권의 책이 나오기까진 너무나 긴 시간이 흘렀다 * '있는힘껏당신' 이라 말해두면 언제나 처음처럼 열심히 살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늘 그렇지만 한권의 책을 묶는 것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책을 묶는 일 말고도 내 삶에 들어와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드린다 더보기
#116_[천서봉] 문을 위한 에스키스 [천서봉]門을 위한 에스키스 낙원을 찾아 헤매다 이렇게 늙어버렸다 수많은 문을 닫고 문에서 나왔다 소슬한 사람과 몸을 섞다 배워버린 키스 때문에 내 문장은 사막이 되었다 똑같은 사랑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은 모든 신음을 문에게서 배운 까닭이다 聞에 가만히 귀 대보면 그 반대편에 누군가가 숨죽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들어왔으니 나온 것이고 당신을 떠나 비로소 당신에게 되돌아온 것이다 이 밤에 별자리 하나 찾아들지 못한 것이 문이 내게 준 유일한 절망이다 그러니 낙원이 아니길 바라며, 불완전한 11월은 끝내 불완전하길 바라며 쓴다 문밖에서 외로이 나를 기다리는 낙타는 아직 끝나지 않은 우리의 問, 악한 짐승과 조우하거나 열등했고 당황했던 순간이 모두 문이었음을 안다 이렇게 늙은 밤에, 모든 문에는 神이 살고 있.. 더보기
#115_[천서봉] 7월의 복합 [천서봉] 7월의 복합 우리는 갈 데까지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연습을 시작한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연습 가령, 비를 가진 구름의 형태에 관한 연구처럼 우리는 한 발을 내딛는다 발끝에서 7월이 시작되고 우리는 소나기를 어느 모서리에 맞추어야 할지 몰라 밤에도 하고 낮에도 하고 그러나 중얼거리는 무지개 때문에 도무지 겹쳐지지 않는 슬픔 되돌아 와서 어디까지 갔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문장 이것은 우리가 처음 발견하는 여름, 찢어져도 괜찮아 연습이니까 가령, 중독되지 않는 고독에 관한 연구처럼 우리는 뜨겁게 반복되고 그리고 버려질 거야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7월에서 끝나버린 발끝 어떤 연습은 시작되기도 전에 끝났으므로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한 발을 내딛는다 영영 못 돌아올 거야 우리에게 헌신하는 7월은 참 .. 더보기
#114_[천서봉] 발산하는 시 http://webzine.munjang.or.kr/archives/tag/%EC%B2%9C%EC%84%9C%EB%B4%89 한동안 나를 되돌아보지 못했다 가지가 자라고 잎들이 무성해지고 나는 버릇없는 어떤 나무처럼 야생의 습성을 익히며 날카로워지고있다 원정이여, 가위를 들고 내 구석구석을 잘라주시길... 언제 발표했었는지 조차 잊어버린 시들을 인터넷에서 발견할 때 그래 나는 그러했었구나 느끼는 이 아련함과 아찔함으로 부디 다시 그 아름답고 순한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나는 너무 멀리 왔는가 내 그리운 사람아 더보기
#113_[천서봉] 매일 매일 매미 [천서봉] 매일 매일 매미 창문에 매달린 얼굴이, 매달린 얼굴이 당신이 계통수 사이 줄줄 흘러내리는 여름의 질병력이 지평선 너머 불행이 쏟아진다고 말하는 입이 살을 녹이는 햇살과 소용되지 않는 내일의 문법이 몸에 스며 되돌아 나오지 않던 바람의 결심이 죽어가는 숲과 잠재된 뿌리의 질긴 싸움이 허기를 배우고 재난을 익히는 아이들이, 그 눈이 말이 안 되는 말과 빛나지 않기로 작정한 빛이 그해 여름 목 밖으로 꺼낼 수 없던 앙상한 비명이 울어도 울어도 끝내 다 울지 못하는 치명이 창문에 매달린 얼굴이, 매달린 얼굴이 당신이 『발견』ㅣ 2014년 봄호 세월호에 탄 많은 아이들이 너무나 긴 여행을 떠나버렸다 이런 슬픈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분노하거나 침묵하는 일이 전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더보기
#112_12월13일 새벽 그래도 시를 쓰던 날들은 무언가 할말이 있었다는 것이겠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시간을 견디는 일은 더없이 고통스럽다. 종일 눈이 내렸고 어두웠지만 끝내 아무것도 덮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것들, 더 선연해지는 것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이렇게나 붐비는 일이라면 공허의 중심에서 도대체 나는 무엇을 견디고 있는 것인가. 당신을 견디고나 있는 것일까. 더보기
#111_[천서봉] 닫히지 않는 골목 골목의 지도** [천서봉] 닫히지 않는 골목* 性 가족공장 _ Memory 내 슬픔의 가장 안쪽에 성 가족 공장이 있다 아침이면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 도로 쪽으로 걸어 나갔고 도로로 나간 아이들은 누구도 되돌아오지 못했다 아이들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는 죽은 이복동생을 닮아서 공장의 굴뚝이 조금씩 자라나고 어느새 굴뚝은 이 골목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은 성 가족공장 공장장인 삼촌의 서른 번째 기일이다 잡설을 불러 저녁 식탁에 앉으면 밥상 위엔 삼촌의 수염 같은 분진들이 조용히 내려앉곤 했다 우울 상점 _ Continuity 한 어린 소녀가 황혼녘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해변에서 돌아온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계속해서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 그 소녀는 멀어져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 더보기
#110_[천서봉] K의 부엌 [천서봉] K의 부엌 이제, 불행한 식탁에 대하여 쓰자 가슴에서 울던 오랜 동물에 대하여 말하자 가령 상어의 입 속 같은 식욕과 공복의 동굴 속에서 메아리치는 박쥐의 밤들 들개의 허기와 늪처럼 흡입하는 아귀, 그 비늘 돋는 얼굴에 대하여 말하자 하여 病의 딱딱한 틈에서 다시 푸른 旬을 발음하는 잡식성의 문명에 대하여 말을 가둔 열등한 감자와 그 기저의 방에 묻힌 다복한 주검에 대하여 말하자 기어이 모든 숨을 도려내고야 말, 아름다운 칼들 붐비는 K의 부엌으로 가자 딱딱하게 굳어 기괴한 신탁의 소리를 내고야 말 혀에 대하여 마침내 말하자 간이나 허파 따위를 담고 보글보글, 쉼 없이 끓는 냄비 속 레퀴엠에 대하여 고백하자, 우리가 요리하고 싶던 오른손, 침묵이 끊어내고 싶던 침묵에 대하여 『창작과 비평』ㅣ .. 더보기
#109_[천서봉] 곤 [천서봉] 困  결별을 겪은 몸을 벽에 걸어두고 나니 어제 입었던 연민은 금세 지루하고 비대해져 버렸다거울 속에 갇힌 겨울 속에는 당신이 인증해준 읍소가 있어 이제 계절과 상관없이 나는 춥다당신은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그만 두었고 그건 정련된 농담 같아서 우린 눈으로만 웃었다입 안에서는 소란한 나무들이 자라 입을 벌릴 때마다 낙엽이 검은 기척들을 안고 쏟아졌다문장을 버리고 다정을 폐기하고 이제라도 남은 겨울을 멀리 남극까지 흘려보낼 수는 없을까 모든 삶을 가사(假死)라 하고 유빙 위에 누워 길고 긴 펭귄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 우리,아픈 것들만 골라 먹으며 왔지, 沒은 어떤 歿이 되고 나는 잠들기 직전에만 잠깐 희열했다다시 만난다면 그땐 누워 누워서 세상에서.. 더보기
#108_[천서봉] 무서운 아이스크림 [천서봉]무서운 아이스크림  녹아있다, 라는 말 아시죠? 사상이 주체에 역사가 책 속에 우울이 삶 속에 내 안에 당신이  추억은 방울방울, 한 주검 속의 세계사와 한 그루 나무에 배어있는 수 천 년의 손금 같은,  가령 작은 세포 속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나를 배후조종하는 우주(宇宙) 말입니다  차갑게 공생하는 불안의 빙하는 언제든 녹아 이 작은 지구와 지구의 감정을 덮칠 것만 같아요   부온탈렌티라는 사람을 아시나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불온해지고 몸은 자꾸만 더워져요   스트로베리 블루베리 블랙베리 수많은 베리 베리들, 숨겨진 배리(背理)의 온도가 두렵습니다  얼굴이 녹아내리고 가면 위.. 더보기
#107_2013 현대시학작품상 심사평 中 2013 현대시학작품상 심사평 中 천서봉의 시들은 어떤 의미에서 조정인의 그것보다 위트의 수단에 한층 가파르게 의존한다. 상상력의 유쾌한 천변만화를 따라 읽는 즐거움이 보통을 훨씬 뛰어넘는다. 재기가 어쩌면 시류에 한쪽 발을 담그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시에서 오래 눈을 떼지 못한 것은, 그의 심상치 않은 언어적 감수성을 행간에서 분명히 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 좋은 시를 쓸 가능성을 타고났으며, 그 수법은 본인이 개척해야 할 일이다. -시인 오태환 [천서봉] 목요일 혹은 고등어 -가령, 사람만한 고등어 두 마리가 카페에 마주 앉아있는 그런 풍경, 사람들은 그 신기한 풍경에 놀라 사진을 찍어대고 둘은 아랑곳없이 서로의 대화를 이어가는, 그런 목요일 몸에서 물이 흘러 바닥을.. 더보기
#106_[이연주] 즐거운 일기 [이연주] 즐거운 일기 내가 죽어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되어서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주부의 손끝에서비늘 벗겨져내가 도마에 오른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되어서 등빛을 등에 달고 펄펄 끓는 솥에 들어가살에 매운 고춧가루 박고 아이들과 그 아버지의 한때즐거움이 되어서그들의 잠자리에 내가 함께내가 죽어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되어서  이연주ㅣ『속죄양, 유다』 세계사   시에 '싸우는 시'가 있고 '져주는 시'가 있다면 나는 결코 '싸우는 시'를 쓰지 못할 것이다그것이 나의 천성이고 또 내가 일정부분 포기해야할 범주다. 잠이 오지 않아 이연주의 시집을 다시 읽었다. 어느 순간 부터 시는 공중으로 떠올라서 검은 연기만 남아버렸다.. 더보기
#105_[천서봉]경계들 [천서봉]경계들 며칠째 비가 내리는 오늘은 빗방울도 졸고 있습니다 지형도와 일기도를 겹쳐놓고 당신을 기다립니다 소멸은 비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뼈와 살이 한데 어우러지는 그런 슬픔을 자정엔 덮습니다 당신에게 편지 쓰는 대신 대문에 페인트를 칠합니다 곳곳에 튄 얼룩들을 지우고 싶지 않습니다 자주 꿈과 오늘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안과 밖이 모호합니다 물매를 따라 구름의 체취가 흘러내립니다 상처 투성이었던 당신이 토마토보다 물리적입니다 오후엔 물시멘트비가 무지개보다 아름답습니다 아름답고 동시에 우리는 불안합니다 풍신風神을 섬기는 어깨 위에 오늘도 한 채의 집을 지었다 허뭅니다 연대하는 것은 대개 한꺼번에 붕괴합니다 집이 우산보다 더 피로합니다 며칠째 비는 계속 내리고 자주 집과 몸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두렵습니다 .. 더보기
#104_[천서봉]나를 울린 한 편의 시 정기구독 목록 나의 정기구독 목록에는 늦은 밤 창가를 스치는 빗소리와 그 빗소리를 들으며 슬쩍슬쩍 읽어보는 윤동주 백석 박용래 같은 눈물을 닮은 이름 몇 자들 새벽녘 앞마당에 고여 있는 막 떠다놓은 찻물처럼 말갛기만 한 하늘 기다릴 필요 없어요, 바람난 애인이 또박또박 적어준 빛이 바랜 하늘색 편지 읍내에서 단 하나뿐인 중앙극장의 야릇하게 생긴 배우들 그 배우들이 슬픈 얼굴로 보여주는 화끈한 '오늘 푸로' 환절기마다 잊지 않고 찾아오는 사나흘간의 감기 그때마다 먹는 빨갛고 노란 알약들, 일요일 담에 널어 말리는 초록색 담요와 그 담요를 말고 자는 둥그스름한 낮잠 그 낮잠 위로 헬리콥터가 한 대 가끔 부르르르 저공 비행을 하다가 돌아가기도 하고 내 낮잠도 부르르르 따라 흔들리기도 하고 낮잠에서 깨어 멍한 .. 더보기
#103_[김점용]검은 가지에 물방울 사라지면 [김점용]검은 가지에 물방울 사라지면   아버지가 찾아왔다 낯선 노인이 아버지 친구라며 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다가 우물가에서 혼자 놀고 있다고 일러 주었다. 우물로 갔더니 일흔아홉의 아버지가 흰 수의에 삼베 꽃신을 신고 두레박에 손을 넣어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버지, 하고 불렀더니 아버지 친구는 나뭇짐 때문에 애조원에서 사람들과 싸우고 있다며 거기로 가보라고 했다 급하게 고개를 넘고 마구촌을 지나 숨을 헐떡이며 애조원에 도착했을 때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아버지는 흰 와이셔츠에 한복 바지를 입고 문둥이와 장기를 두고 있었다 아버지, 하고 불렀더니 그는 꿈쩍도 않고 대신 문둥이가 뭉개진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쉿거렸다  등을 보인 아버지는 이번에도 아버지 친구일 터  상심하여 돌아.. 더보기
#102_[천서봉] 66/100 꿈을 꾸었다 관음의 꿈이었다 신형철의 글을 읽었다 신형철은 과연 제2의 김광남이라 부를만하다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지식의 재해석이고 피해야할 것은 관념이 아니라 관념의 명징성이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은 말이지만 책을 덮으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또 꿈을 꾸겠지 하지만 씻어도 씻어도 사람은 깨끗해지지 않을 것이다 [천서봉] 66/100_나의 시 나의 시론 #_002 그것의 일부는 저것의 일부다. 나의 왼편은 당신의 오른편이다. 모든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_003 오전이 사라진 일요일이 계속되고, 당신은 몰라보게 쑥쑥 자라나고, 수염만큼이나 거친 눈빛의 내가 라면을 사러가는, 가령 그런 장면, 시는 형태가 사라진 이미지, 혹은 이미지마저 사라지고 난 뒤의 어떤 형태. 시는 도돌이표. #_004.. 더보기
#101_[천서봉]2월 [천서봉]2월  길옆 사시나무가 떨고 있어 품에 안고 돌아왔으나   집으로 돌아와 펴 보니 한 잎 낡은 여자였다   여자를 씻겨 저녁의 옷걸이에 걸어두었는데   젖은 말투가 바닥을 적셔 내내 겨울이었다   열린 창을 닫고 마저 내 귀를 닫고 북어의 몸에   불 꺼진 문자의 옷을 입혀주었다 달빛을 입고   노랗게 구워지는 물신物神들을 바라보다가  깨어나니 여자는 사라지고 낡은 편지가 놓여있었다   잃어버린 2월의 이틀이 거기 곱게 접힌 채 들어있어  미치지 말자 미치지 말자 주문을 외워보는 밤마다  한 움큼의 구름과 맹세가 텅 빈 천장을 떠돌았다  2월엔 어떤 불립不立의 무늬도 거짓이 .. 더보기
#100_돌아보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시에 다다르는 길은 두 가지다. 본질과 맞서거나 혹은 본질을 철저히 회피하거나. 시인이 사는 길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문득 생각한다. 아프지 않은, 혹은 아프지 않았던 시인이 있을까. 인간의 표현 방식 중 가장 처절한, 글을 선택한 사람들 오늘 지나간 내 오랜 시간들을 되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10년 주기로 나는 무척 아팠고, 그리고 그 이후로 그 전과는 조금 다른 그런 삶을 살아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까지 세 번 변했고 네 번째 변하려는 시기다. 지금 이후 나는 또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 내게 묻는다. 첫 시집의 자서처럼 세월은 겨우 몇 개의 목차로 요약될 뿐이었는데 누구는 칼을 갈자고 했고, 누구는 잊지 말자고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행복하자, 모두들 더보기
#099_솔섬 나는 미신을 믿는다 믿는다기 보단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귀가 얇은 탓도 있지만 까짓거 시도 믿는 세상에 시보다야 미신이 더 믿을만 하잖는가 분명, 나는 늙어가고 있다 이 여행이 당신과 갔던 마지막 여행이 아니기를 나는 간절히 희망한다 더보기
#098_스러지는 빛, 하루는 담양 '글을 낳는 집'에서 만난 몇몇 사람들과 늦은밤 막걸리파티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소설가 임영태 선생님은 역시 소설을 쓰시는 부인의 시 한 편을 낭송하셨어 그 시가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그 시를 듣는 순간 모두 외어버릴 수 밖에 없었거든, 그 시를 여기에 옮겨두려고 해 빛은 조금이었어 아주 조금이었어 그런데 그게 빛이었거든 -빛, 이서인 (전문) 더보기
#097_제 가방을 잠시만 맡아주세요 문학동네에서 만들어 준 작가레터를 가져다 놓는다 책이 나와서 잠시 행복했었던 14개월 전 그때 생각을 해본다 시는 잘 안쓰여져야 정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여전히 힘들고 여전히 고통스럽다 더보기
#096_[천서봉]메모들 [천서봉] 메모들    詩의 이곽(耳郭)과 가장 유사한 것은 모래 아닐까,   말로 도강할 수 없는 정념, 災의 문장, 그건 유령인가?  냉장고에 불고기 재워놓았다 사랑한다  후문 쪽으로 돌아나가는 눈 덮인 운동장의 배후는?  상처가 또 다른 상처를 만드는 사람의 행태  사람에 대한 관찰은 미음처럼 적어도 디귿처럼   날씨 흐림, 서정이던 것들은 이제 다시는 서정 아닌 건가?  아이스크림은 모래가 되고 싶고 질문은 위로가 되고 싶지  우리는 조금씩 느꼈다 아무 것도 변화하지 않는 것을  안개를 이해하는 새벽의 나무들, 불면 아니면 불멸  정도 많고 병도 많은 지구에서 조급하지 말기  덜.. 더보기
#095_[천서봉]발목이 없는 사람 [천서봉]발목이 없는 사람   영혼에 관해 말할 때, 우린 자주 발목을 잃어버리곤 했습니다  발목이 사라져간 자명한 어제를 이제 상징이라 부르겠습니다   어디선가 물이 끓는데, 돌고 도는 목성의 얼음띠 같은 영혼들 낯선 곳에서 잠을 깨는 일은 소멸에 가까워서 아름다웠습니다 문턱을 넘지 못하는 생각은 무너지고 나서도 다시 무너지겠죠  깊어지는 모든 것은 철학이 될 테고 자정은 비밀과 닮아갑니다 골목이 소매와 닮았습니다 점점 더 소문에 가까워지는 우리들 알아보겠습니까, 이제 물은 끓어오르다 못해 넘치고 있습니다 당신을 설득할 생각이 없는 나는 당신 병이나 함께 앓았으면 했습니다   『시인동네』ㅣ..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