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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사랑하다

#107_2013 현대시학작품상 심사평 中

 

 

 

 

 

 

2013 현대시학작품상 심사평 中

 

 

천서봉의 시들은 어떤 의미에서 조정인의 그것보다 위트의 수단에 한층 가파르게 의존한다. 상상력의 유쾌한 천변만화를 따라 읽는 즐거움이 보통을 훨씬 뛰어넘는다. 재기가 어쩌면 시류에 한쪽 발을 담그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시에서 오래 눈을 떼지 못한 것은, 그의 심상치 않은 언어적 감수성을 행간에서 분명히 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 좋은 시를 쓸 가능성을 타고났으며, 그 수법은 본인이 개척해야 할 일이다.

 

-시인 오태환

 

 

 

 

 

[천서봉] 목요일 혹은 고등어

 

 

 

-가령, 사람만한 고등어 두 마리가 카페에 마주 앉아있는 그런 풍경,

사람들은 그 신기한 풍경에 놀라 사진을 찍어대고

둘은 아랑곳없이 서로의 대화를 이어가는, 그런 목요일

 

 

 

몸에서 물이 흘러 바닥을 적시듯 그렇게 만납시다 사탕이 잔뜩 묻은 궐련을 쥐고

 

수요일은 이르고 금요일은 조금 늦고, 그러니 목요일쯤 만납시다 새벽이 고인 사발을 들고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우리가 너무 늙어있을 터이니, 그러니 목요일쯤 만납시다

 

어제까지의 등푸른 이별 이야기를 나누고 희롱 받은 혀와 살 몇 점을 술잔 두어 개에 나누어 담게

 

반쯤 마시고 또 반쯤은 거기 남겨둘 수 있게, 추분이나 동지 같은 근심의 귀를 이제 열어두게

 

수요일까지 우리가 살아남은 기적에 대해, 그건 거의 마법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의뭉 떨게

 

그렇게 우리 목요일쯤 만납시다 사랑이 아니었거나 혹은 사람이 아니었거나 그러나

 

사랑이거나 사람이어도 괜찮을 목요일에, 마치 월요일인 것처럼, 아니 일요일의 얼굴로

 

흘러내린 표정이 바닥에서 말라가듯, 유통기한이 딱 목요일인 쓸쓸한 통조림처럼 우리,

 

 

 

『시인세계』ㅣ 2012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