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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사랑하다

#110_[천서봉] K의 부엌

 

 

 

 

 

 

[천서봉] K의 부엌

 

 

이제, 불행한 식탁에 대하여 쓰자 가슴에서 울던 오랜 동물에 대하여 말하자

 

가령 상어의 입 속 같은 식욕과 공복의 동굴 속에서 메아리치는 박쥐의 밤들

 

들개의 허기와 늪처럼 흡입하는 아귀, 그 비늘 돋는 얼굴에 대하여 말하자

 

하여 病의 딱딱한 틈에서 다시 푸른 旬을 발음하는 잡식성의 문명에 대하여

 

말을 가둔 열등한 감자와 그 기저의 방에 묻힌 다복한 주검에 대하여 말하자

 

기어이 모든 숨을 도려내고야 말, 아름다운 칼들 붐비는 K의 부엌으로 가자

 

딱딱하게 굳어 기괴한 신탁의 소리를 내고야 말 혀에 대하여 마침내 말하자

 

간이나 허파 따위를 담고 보글보글, 쉼 없이 끓는 냄비 속 레퀴엠에 대하여

 

고백하자, 우리가 요리하고 싶던 오른손, 침묵이 끊어내고 싶던 침묵에 대하여

 

 

 

『창작과 비평』ㅣ 2013년 겨울호

 

 

 

 

행과 불행 사이를 오가느라 분주했다

그것이 시를 쓰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지만,

 

지친 몸은 쉼없이 바빴고

마음은 더없이 우울했다 

 

당신의 창문은 온통 검은 색이고

나의 한해는 이렇게 저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