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뿌리내리는 아버지

#104_[천서봉]나를 울린 한 편의 시

 

 

 

 

정기구독 목록

 

 

나의 정기구독 목록에는

늦은 밤 창가를 스치는 빗소리와

그 빗소리를 들으며 슬쩍슬쩍 읽어보는

윤동주 백석 박용래 같은 눈물을 닮은 이름

몇 자들 새벽녘 앞마당에 고여 있는

막 떠다놓은 찻물처럼 말갛기만 한 하늘

기다릴 필요 없어요, 바람난 애인이

또박또박 적어준 빛이 바랜 하늘색 편지

읍내에서 단 하나뿐인 중앙극장의

야릇하게 생긴 배우들 그 배우들이

슬픈 얼굴로 보여주는 화끈한 '오늘 푸로'

환절기마다 잊지 않고 찾아오는

사나흘간의 감기 그때마다 먹는 빨갛고

노란 알약들, 일요일 담에 널어 말리는

초록색 담요와 그 담요를 말고 자는

둥그스름한 낮잠 그 낮잠 위로

헬리콥터가 한 대 가끔 부르르르

저공 비행을 하다가 돌아가기도 하고 내 낮잠도

부르르르 따라 흔들리기도 하고 낮잠에서 깨어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들어버린

제라늄 화분 저물 무렵 혼자서 끓여 먹는

삼양라면 다시 필까, 물을 줘보기도 하지만

소식이 없는 제라늄 화분 시들었구나,

식은 밥을 말다 말고 나는

 

이렇듯 내 가난한 정기구독 목록에는

가난하고도 외로운 이름 몇 개와

붉은 줄이 그어진

희망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하는

연체된 고지서의 커다란 글자들

 

 

최갑수 시집 『단 한 번의 사랑』ㅣ 문학동네

 

 

 

 

 

가난을 겪지 않은 사람이 가난에 대하여 알 턱이 없다. 그것이 얼마나 숨 막히고 서러운 일인지, 그 모든 격정이 단지 머릿속의 일이 아니라 밥을 먹고, 병원에 가고, 사람을 만나는 일상의 모든 것들을 지배하고 좌지우지할 때, 우리는 견디지 못하는 마지막 힘으로 견디고,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는 쓸쓸함으로 버티면서 산다. 대선이 끝났고 어찌되었건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했다. 누구를 탓하거나 누구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이제 우리에겐 각자의 몫을 견뎌야하고 각자의 민주주의를 책임져야 하는 사실만이 남았다.

 

내가 「정기구독 목록」이라는 시를 처음 읽은 것은 그러니까 2001년으로 기억된다. 사실 지금까지 나는 최갑수 라는 시인을 만나본 적도, 저 시인이 그 뒤에 새로운 시집을 묶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도 없다. 당시 나는 시에 입문한지 몇 년 되지 않은 시인지망생이었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사회초년생이었으며 그리고 가난했다. 그러나 당시 출간되던 적어도 20여종의 문학지를 나는 계절마다 거르지 않고 읽었으며 그 많은 시들과 시인들을 내 스승으로 삼으며 살았다. 물론 저 시에도 나오는 백석, 박용래와 같은 우리시의 근간 또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나를 울린 한 편의 시’를 스스로 선정해야 했을 때 나는 문득 시인의 저 시가 떠올랐다. 기형도나 진이정 같은 시인도 아니고, 내 시를 만들어 준 그 수많은 시인들이 아니라 기억에서 이탈한 줄만 알았던 한 젊은 시인이라니.

 

자, ‘나를 울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실로 눈물을 흘린다는 의미일 수도, 종이 울리듯 내 가슴을 친다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 울어 본 일은 손에 꼽을 정도이니 아마도 내게 있어 시를 읽고 시에서 얻고자하는 본령은 후자가 아닐까 싶은데 잊어버렸다 싶은 일이 어느 순간 어떤 계기로 고스란히 되살아오는 경험을 누구나 한번쯤은 가지고 있듯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최갑수 시인의 시 한 편을 더듬더듬 다시 찾아 읽어보기에 이른 것이다.

 

필자가 시를 시작하고 등단을 하고 첫 시집을 내는 동안 십 여 년 넘는 세월이 지나갔지만 이제야 겨우 문학의 시작임을 깨달을 때 오랫동안 천착해오던 시의 몸은 그저 몇 개의 옷을 갈아입는 일에 지나지 않았음도 알게 된다. 시와 반시, 서정시와 환상시, 시에 관한 그 모든 분류는 그저 편의상의 주머니일 뿐, 세상의 모든 시는 가슴 속에 도저한 질문들에 다름 아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내 가난에 대하여 얼마나 솔직한가. 스스로에게 질문이 많아지는 한 해의 시작점에 우리는 서 있다.

 

희망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하는/ 연체된 고지서의 커다란 글자들

 

최갑수 시인의 시를 마음에 담아 둔 이유는 물론 그의 탁월한 의인(擬人)과 대상을 감각화하는 시인의 수일한 시적 더듬이 덕분이지만 무엇보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먼저 읽어내는 시적 진심 때문이겠다. 머리로 읽느냐 가슴으로 읽느냐의 의견이 다를 수 있겠지만 작가가 머리로 쓰면 독자도 머리로 읽을 것이고 작가가 가슴으로 쓰면 독자 역시 가슴으로 읽겠다는 짐작은 어쩌면 당연한 진실 아닐까. 시에서의 울림이란 그렇게 전염되고 발화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야말로 불립(不立)과 비불립(非不立) 사이를 오가는 문자의 힘이 아닐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경하는 김현 선생의 말처럼 시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시를 내려놓고 다시 삶으로 돌아와 보자.

 

우리가 비록 가난하더라도 해야 할 것들이 있고 더 이상은 미루어 둘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무슨 대단한 전사로서의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쓸쓸하고 비루하더라도 우리는 지금 우리 앞에 놓여있는 <정기구독목록>을 직시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들춰보아야하는 가족들, 친구들, 동료들, 그리고 그 때 묻은 페이지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가슴으로 읽어야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희망을 꿈 꿀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지, 그것에 대하여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단지 변하지 않는 것은 여전히 각자의 가난과 신파를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우리의 詩이고 시적 아이러니며 또한 감당하여야 할 울음의 실체겠다.

 

 

 

『계간웹북』 2013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