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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okkor 40mm

#088_[서대경]가을밤 [서대경] 가을밤 어느 가을밤 나는 술집 화장실에서 원숭이를 토했다 차디찬 두 개의 손이 내 안에서 내 입을 벌렸고 그것은 곧 타일 바닥에 무거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내렸다 그것은 형광등 불빛을 받아 검게 번들거렸고 세면대 아래 배수관 기둥을 붙잡더니 거울이 부착된 벽면 위로 재빠르게 기어올라갔다 나는 술 깬 눈으로 온몸이 짧은 잿빛 털로 뒤덮이고 피처럼 붉은 눈을 가진 그 작은 짐승의 겁먹은 표정을 바라보았다 나는 외투 속에 원숭이를 품었다 그것은 꼬리를 감고 외투 속 주머니 안에 얼굴을 파묻은 채 가늘게 몸을 떨었다 내 잔에 술을 채우던 사내가 놀란 눈으로 어디서 난 원숭이냐고 물었다 「구역질이 나서 토했더니 이 녀석이 나왔네」나는 잘게 자른 오징어 조각을 원.. 더보기
#084_약현성당에서 약현성당에 갔었다 재수시절, 학원 앞에 있던 성당은 나를 닮아 늘 어딘가 절박했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내게 약현성당이나 삼수공원은 내 긴 하루처럼 불안하고 동시에 고요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열 명이 모이면 열 명 중에 가장 시끄러운 한 사람이었다 고요가 필요할 때마다 저기서 내 불안들을 이야기하곤 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지만 약현성당만은 꼭 한번 다시 가보고 싶었다 저무렵 내게 있어 건축과는 2지망에 불과했다 저 건물이 대한민국 최초의 고딕식 건물이라는 건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른 뒤 건축을 전공하며 알게되었을 뿐이다 그땐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나를 스쳐간 무엇인가가 훗날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사람도 때론 그러하다 그러나 어쩌랴, 중림동 약현성당으로부터 이십여 년의 세월이 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