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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사랑하다

#096_[천서봉]메모들

 

 

 

[천서봉] 메모들

 

 

 

詩의 이곽(耳郭)과 가장 유사한 것은 모래 아닐까,

 

말로 도강할 수 없는 정념, 災의 문장, 그건 유령인가?

 

냉장고에 불고기 재워놓았다 사랑한다

 

후문 쪽으로 돌아나가는 눈 덮인 운동장의 배후는?

 

상처가 또 다른 상처를 만드는 사람의 행태

 

사람에 대한 관찰은 미음처럼 적어도 디귿처럼

 

날씨 흐림, 서정이던 것들은 이제 다시는 서정 아닌 건가?

 

아이스크림은 모래가 되고 싶고 질문은 위로가 되고 싶지

 

우리는 조금씩 느꼈다 아무 것도 변화하지 않는 것을

 

안개를 이해하는 새벽의 나무들, 불면 아니면 불멸

 

정도 많고 병도 많은 지구에서 조급하지 말기

 

덜컹거리는 뒷문의 긍정을 듣네, 오늘 저녁은 불고기

 

유령아 나는 네가 올까 가끔 창문을 열어두고 잔다

 

물한년한 이 식탁, 최초의 말후구(末後句), 불가촉적 函

 

 

 

『시인세계』ㅣ 2012년 겨울호

 

 

 

천서봉은 뚱뚱한 슬픔, 더러운 설움, 난처한 사랑을 아는 시인이다. 그것은 그가 장삼이사의 내면에서 시를 길어 올리고 있다는 얘기인데, 그는 그 내면의 순결함과 그 외면의 참혹함을 동시에 본다. 이것이 그의 시가 아이러니적 간격을 품는 이유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유머와 진지함, 잠언과 관용구, 농담과 고백 같은 이질적인 요소들이 공존한다. 풍요롭고 다정하다. 아마 사람도 그럴 것이다. - 시인 권혁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