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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사랑하다

#094_[천서봉]목요일 혹은 고등어

 

 

 

 

[천서봉] 목요일 혹은 고등어

 

 

 

그곳에서는 진화하지 않는 동선을 등에 문신하고 그것을 파루罷漏라 부르더이다

 

관념의 저수지로 다가와 물만 먹고 달아나는 다람쥐의 소슬한 걸음걸이

 

희미한 의식이 홀로 인적 없는 새벽을 배회하는 휑뎅그레한 풍경

 

어둠이 창궐하는 길을 따라 흉가의 방문榜文을 모사하는 문장들

 

한 마리의 네모 두 마리의 동그라미 세 마리 푸른 등뼈가 달빛에 탄다

 

그곳에서는 한낮에 귀소하는 몽마의 마중조차 역역力役이라 하더이다

 

 

 

『시와미학』ㅣ 2012년 겨울호

 

 

 

[단상]

 

하루하루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시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시를 쓰고 다듬는 일을 통해 나를 다듬고 다스리는 일을 배울 수 있었으면 한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사랑이라고

이번이 나의 마지막 시가 될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번번히 속으면서

아니 속이면서

그러나 내게 속는 것은 나 뿐임을 깨달으면서

그 수없는 마지막들에게, 미안하고 그저 미안하다.

 

어제 만난 Y는 누군가의 말을 인용했다.

'글을 쓰는 일은 모든 것을 거는 일'이라고

그렇다, 그러나 그건 글을 쓰는 사람만이 알 뿐,

그 외의 누구도 그런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으며

또 알릴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런 고통을 입 밖으로 내보내는 순간 우리는 함께 무거워질 뿐이다. 

 

가볍게 걸어가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쉽게 만났다가 쉽게 헤어지는 것처럼. 

 

쉬운 것들이 남기는 그 뒤의 숙제가 내 것이 될 것이다.

글이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