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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_[한우진]딸기 [한우진] 딸기  구름 때문에 바지가 흘러내렸다문장 하나가 완성되자꿀에 가까워지는 여자들,늑골 사이로 저녁놀이 삐죽거린다 만조에 다다른 밀밭의 아랫도리,여름의 발굽이 잇다홍을 퍼트린다어떤 문장이 증발하기 전에모자를 벗고 모자에유두만 골라 따 담았다  한우진ㅣ『까마귀의 껍질』 문학세계사 [단상]  그러니까 좋은 시는, 언제 읽어도 좋다아마 백 년 뒤에도 저 시는 그럴것이다 어제는 C시인과 J시인을 만나 저녁을 먹었다어려운 시기에 다시 일자리를 얻으셔서 다행이다 사람은 언제나 사람 때문에 힘들다그리고 내가 힘든 건 언제나 나 때문이다 미안하다 그리고 용서를 빈다다 나 때문이고 다 구름 때문이다  .. 더보기
#088_[서대경]가을밤 [서대경] 가을밤 어느 가을밤 나는 술집 화장실에서 원숭이를 토했다 차디찬 두 개의 손이 내 안에서 내 입을 벌렸고 그것은 곧 타일 바닥에 무거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내렸다 그것은 형광등 불빛을 받아 검게 번들거렸고 세면대 아래 배수관 기둥을 붙잡더니 거울이 부착된 벽면 위로 재빠르게 기어올라갔다 나는 술 깬 눈으로 온몸이 짧은 잿빛 털로 뒤덮이고 피처럼 붉은 눈을 가진 그 작은 짐승의 겁먹은 표정을 바라보았다 나는 외투 속에 원숭이를 품었다 그것은 꼬리를 감고 외투 속 주머니 안에 얼굴을 파묻은 채 가늘게 몸을 떨었다 내 잔에 술을 채우던 사내가 놀란 눈으로 어디서 난 원숭이냐고 물었다 「구역질이 나서 토했더니 이 녀석이 나왔네」나는 잘게 자른 오징어 조각을 원.. 더보기
#086_[천서봉]목요일 혹은 고등어 [천서봉] 목요일 혹은 고등어 -가령, 사람만한 고등어 두 마리가 카페에 마주 앉아있는 그런 풍경, 사람들은 그 신기한 풍경에 놀라 사진을 찍어대고 둘은 아랑곳없이 서로의 대화를 이어가는, 그런 목요일 몸에서 물이 흘러 바닥을 적시듯 그렇게 만납시다 사탕이 잔뜩 묻은 궐련을 쥐고 수요일은 이르고 금요일은 조금 늦고, 그러니 목요일쯤 만납시다 새벽이 고인 사발을 들고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우리가 너무 늙어있을 터이니, 그러니 목요일쯤 만납시다 어제까지의 등푸른 이별 이야기를 나누고 희롱 받은 혀와 살 몇 점을 술잔 두어 개에 나누어 담게 반쯤 마시고 또 반쯤은 거기 남겨둘 수 있게, 추분이나 동지 같은 근심의 귀를 이제 열어두게 수요일까지 우리가 살아남은 기적에 대해, 그건 거의 마법에 가까운 일이었다.. 더보기
#079_[김병호]시 [김병호]시  내게서 증오를 훔쳐 가지 않고서야미쳤다고 들풀은 수액을 끌어올려이슬을 달았을까 기도에게 약속을 구걸하지 않고서야미쳤다고 허공은 안개를 쥐어짜한 획 휘파람을 날렸을까 무료하게 긴 복도를 서성이며콧물을 빨다가 내장까지 들이마신공복의 저녁을 낙타가 지난다 연기를 채집하는 아이가 지난다어둠을 빼앗긴 그림자가 지난다내게서 두려움을 추출해 스스로 땅거미 지는미친 글자들, 심연의 야윈 잔등  김병호ㅣ『포이톨로기』 문동 [단상]  누가 내게 시의 끝은 어딘지 좀 가르쳐줄 순 없나? 그런 곳이 정녕 있기는 한가? 한 권의 시집을 다 읽고 난 뒤에그 시집의 반도 읽지 못했다는 생.. 더보기
#034 #034_하늘색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나는 원고들을 만지작 만지작... 다시 보게 될거야, 저 푸른 하늘. 그러고 보면 하늘 만큼 다양한 색을 가진 것이 없는데 '하늘색'이라 말하면 나도 당신도 다 아는 바로 저런 하늘색을 말하는 것이지 '하늘'이라 발음하면 우리는 파랑으로 부터 조금 더 가벼워지고 마치 발레리나의 깨금발 뒷꿈치만큼. 꼭 그만큼 상쾌해 지는 걸 더보기
#031 #031_사진 사진들, 찍어보고 싶은 짧은 순간 비오는 날 웅덩이에 번지는 파문들 수줍게 웃는 소녀들 몽골의 어느 끝없는 들판에 펼쳐지는 쓸쓸한 일몰 손으로 직접 쓴 당신의 글씨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어떤 봄날, 그리고 더 더러워지기 전의 내 영혼 더보기
#023 #023 _ 무제 사람에겐 누구나 이상한 계절이 지나가곤 한다 그땐 잘 모르지만 지나고 보면 그때가 내게는 다시 오지 않을 이상한 계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술을 해야하는 사람이 삶을 배우느라 그 독특한 감성을 잃어가고 예술을 하지 말하야하는 사람이 예술을 하면서 사람들을 속인다. 내가 사랑했던 몇 몇의 예술가들을 떠올리면 아닌 것을 알면서 영영 그 곁에 머물러주고 싶었던 계절이 있었다 사는 일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한 평생 살고 싶었던 이상한 계절이 내게도 있었다 더보기
#022 #022 _ 여기는 그림자 속 _ 허수경 아마도 내가 당신을 잊어버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야 이렇게 잠 속에 든 당신 옆에 내가 누워 있겠는가, 이제 당신을 나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후략) *********************************** 아름다운 문장이다. 시를 어떻게 쓰는지 잊어가고 있다. 나를 잊어가고 있다. 나도 당신이 되어 가는가. 더보기
#017 #017 _ 꽃이 없었다면 내 사진의 팔할은 꽃인데 꽃이 없었다면, 난 무엇을 찍었을까 H시인이 참 줄기차게도 오밤중에 전화를 하시는데 받을 수가 없다, 받아서 잘 있노라고 얘기를 할 자신이 없다 내가 H시인을 피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어디 아무도 없는 시골에 가서 시나 쓰겠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란 것을, 내 주위 사람들은 알기나 하는 걸까 P.S. 내게 오는 꽃들의 팔할은 당신이 보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더보기
#015 #015 _ 무제 지나간 시간을 부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지나간 사랑도, 지나간 기회도, 의미없이 그냥 지나가는 일은 없다 아플 일은 아파야하고, 후회 마땅한 일은 더 뼈저리게 후회해야한다 그래야만 앞으로 갈 수 있다 위기는 아직 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더 아플거라면,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