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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사랑하다

#045_[천서봉]프라하,

 


 

                                                                                      사진_Y동_천서봉


[천서봉]프라하,
-詩의 나라


독감에 걸린 밤이다 아주 오래전 내가 여기 살았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 확신했다 라디에이터에서는 텅- 텅- 낡은 공기가 연신 주먹질을 해대고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몇 겹의 옷을 껴입고 나는 - 쉴 새 없이 기차들이 중앙역을 나가고 들어왔지만 - 어디로도 떠나지 않는 허름한 양철침대에 누워 詩의 나라로 간다 편안하다 지독하게 편안하여 아프다 이곳이 나의 전생이 아니라면 이국의 먼 눈발에 어찌 몸이 먼저 아프겠는가 모른다 모른다 몰다우, 구눌하게 중얼거리면 내 안에도 깊은 강이 흐르기 시작하고 까를 까르륵, 미친 듯 부르짖는 창밖의 폭설엔 내 깊어진 病이 살갗을 빠져나와 이제 당신마저 임리한데, 조금만 더 떨면 첼로의 커다란 몸처럼 나도 소리를 낼 것만 같은 겨울밤, 곱게도 내가 미쳐있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 알았다 나와 당신과 착란이 삼중주로 깊어가는, 프라하 프라하 파리한 내 입술 떠는 소리 듣는다 독감 걸린 밤이다


현대시 ㅣ 2011년 가을호


[단상]
독감으로 정신이 없었다, 이 시를 이재훈 시인께 보내던 그 무렵, 일주일 
처음으로 마감기한을 넘겨서 시를 보내기도 했다
발표되어 책이 집으로 왔는데, 이런, 내가 보낸 것이 최종 퇴고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냥 웃을 수 밖에, 독감은 나았고, 시에 걸린 독감은 아직...
다시 갈 수 있다면, 다시 떠날 수 있다면
여전히 나의 첫 지도는 프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