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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사랑하다

#046_[천서봉]너무 오래 사랑하다





[천서봉]너무 오래 사랑하다


  夏.
  햇볕 속에서  달콤한  복숭아들이 얼굴을 붉혔다.  두꺼운  종이로
겉포장을 해도,  詩集은  금방 티가 났다.  시는 뭣 땀시 쓴댜- 단골
백반 집 아주머니 말  근처에서 몇 번의 사랑이 지나갔다. 거짓말하
던 서정들, 건너 과일가게엔  복숭아들이 허불허불 웃고 있었다. 일
식이었다.

  秋.
  위통처럼 걸린 장마전선에  며칠을 집에서 뒹굴었다.  수음만으로
도  천장은 배가 불러왔지만  방생한 물고기들은  바다로 가지 못했
다.  숨이 막혔다. 기도와 식도 사이에서, 홈통과 지붕 사이에서, 은
밀한 내통이 울컥거렸다. 매직아이처럼 벽지는 지도를 밀어 올리고
가을의 나무들이 또륵또륵 목구멍 가득 血吐를 내달았다.

  冬.
  애인은 브래지어 없이 나를 만나러 나왔다.  그녀와 헤어져야겠다
는 생각을 처음 했다.  광장에 모인 비둘기들은 지나치게 살이 올라
있었다.  통통한 연민들이 땅 위를 서성거렸고 다만 모든 상징이 눈
처럼 지루했다. 조형벽은 더러워져 가는 내 영혼을 닮아 있었다. 돌
아오는 길  근처 공사장에서  비계를 타고 오르내리는 사내를  보았
다. 같이 무너져버리고 싶다고 내게, 사랑니가 말했다.

  秋.
  香 자만 갉아먹은 책벌레를 잡아  냄새 맡아보았다.  먼 곳에서 돌
아와 바람은  내 황홀한 슬픔에 대해 물었지만  어떤 추억도 향초의
무덤 쪽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벌레의 부드러운 다리들이  허공을
엮는 것 보다가 향기가 지워진 책들을 불살라 주었다. 빈 마당의 상
처를 낙엽이 다 덮지 못했다.  돌아다닐 행간이 사라진 다음에야 벌
레를 축복했다.

  夏.
  꽃 속에서 죽은 적이 있다. 단물에 젖은 날개가 훈장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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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을 냈다 겨우
시작인 것이지만, 만감이 교차한다
시를 쓰는 순간 순간 생각했다
단 한 명이라 할지라도 그의 심장을 뛰게 할 수 있다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충분하다

왜 쓰느냐에 관한 스스로의 물음에 대답하고 나면
그 한 사람을 얻는 일이 쉽진 않을거야, 다시 조용히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 것이지

그러나 어찌되었건, 길고 길었던 방황의 한 시절을 이렇게 요약하고
나는 어디로든 또 걸어가야만 한다
이 이후로도 나는 외로울 것이다
그것만이 여전히 희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