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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사랑하다

#049_서봉氏의 가방

 


[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서봉氏의 가방

 
집어넣을 수 없는 것을 넣어야 한다,
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거리는
더 커다란 가방을 사주거나
사물을 차곡차곡 접어 넣는 인내를 가르쳤으나
바람이 불 때마다 기억은 집을 놓치고
어느 날, 가방을 뒤집어보면
낡은 공허가 쏟아져, 서봉氏는 잔돌처럼 쓸쓸해졌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
가령 흐르는 물이나 한 떼의 구름 따위,
망상에 가득 찬 머리통을 담을 수 있는, 그러니까
서봉氏와 서봉氏의 바깥으로 규정된 실체를
통째로 넣고 다닐 만한 가방을 사러 다녔지만
노을 밑에 진열된 햇살은 너무 구체적이고
한정된 연민을 담아 팔고 있었다.

넣을 수 없는 것을 휴대하려는 관념과
이미 오래 전에 분실된 시간
거기, 서봉氏의 쓸쓸한 가죽 가방이 있다.
오래 노출된 서봉氏는 풍화되거나 낡아가기 쉬워서
바람이나 빗속에선 늘 비린 살내가 풍겼다.
무겁고 질긴 관념을 담고 다니느라
서봉氏의 몸은 자주 아프고
반쯤 벌어진 입은 늘 소문을 향해 슬프게 열려 있다.



"누구와 사귀고 있는지 말한다면 네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 주겠어." 괴테의 말입니다. 저는 조금 쉽게 갈래요. "너의 가방 속을 보여 준다면 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어." 가방 속을 보면 당신이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어요. 당신이 즐겨 쓰는 필기도구, 휴대용품의 종류로. 읽고 있는 책과 펼치면 그 안에 그어진 밑줄들로. 온갖 내밀한 것들을 내게 보여 주세요. 그런데 가방에 넣을 수 없는 것을 넣고 싶어 하는 서봉氏를 어찌해야 좋을까요. 넣을 수 없어 쏟아서 보여 줄 수도 없는 것들을 우리도 한두 개쯤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당신의 가방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당신의 알 수 없는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이런 독백은 너무 어리석은가요? 가방 바깥쪽의 로고 무늬만 보아도 당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고들 하는 세상인데.


한국일보 2012.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