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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사랑하다

#052_반전의 시선





[천서봉] 고갈비 굽는 저녁

죽음이, 이렇게나 달다니.
그러나 이 저녁은 생선의 것도 내 것도 아니다
 

# 한 사석에서 정진규 시인은 “현재의 나의 시에 끝없이 의문을 갖는다”라는 말을 하면서 자기 점검의 필요성을 피력한 바 있다. 그 자리에서 고희를 넘긴 원로시인이 시적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나이 들수록 시가 깊고 원융해지기 위해서는 냉철한 성찰과 엄정한 자기 판단이 중요하다. 대개 일정한 위치에 이른 시인들이 조로하여 동어반복을 일삼거나 자기 세계에 안주하여 갱신의 노력을 하지 않고 더 이상의 변화를 보여주지 못할 때 독자는 눈을 돌리게 된다. 한때의 명망에 눈이 멀어 자기 작품이 최고인 줄 아는 착각 속에서 시는 퇴기처럼 비루해지고 한 순간에 98년 정도 퇴보하는 것이다.
 
최근에 펴낸 천서봉의 시집 『서봉 氏의 가방』을 읽으면서 신인과 원로 모두 시를 쓰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천서봉의 시 「고갈비 굽는 저녁」은 2행의 짧은 시다. 요즈음 시단의 일각에서는 짧은 시를 지향하는 움직임이 있다.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지만 간혹 삶과 세계에 대한 탐구의 정지, 치열하게 시의 세계를 열어가고자 하는 의지의 결여, 설득력 없는 선적 제스처 등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인용한 천서봉의 시는 시적 사유와 기교가 예사롭지 않다.
 
화자 앞에 놓여 있는 것은 고갈비다. 고갈비를 화자는 죽음과 등치시키고 ‘달다’라고 말한다. 이 시에서 죽음은 일상의 인식을 뛰어넘는다. 어둡고 무겁고 절망적이지 않은 신종의 죽음이다. 그리하여 ‘달다’라는 역설적 표현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익숙한 삶의 풍경에서 낯선 삶의 일면을 읽어내는 시인은 2행에서 다시 비약적 상상력을 펼쳐 보여준다. 화자의 시선이 ‘고갈비’에서 ‘저녁’으로 껑충 건너뛰는 것이다. 여기서 정서적 충격이 돌발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좋은 시의 미덕 중의 하나이다. 답답하고 옹색한 시들은 언어와 언어 사이의 불꽃을 잡아내지 못한다. 정형화 된 틀을 부수지도 뛰어넘지도 못하는 것이다. 교과서적인 시작법에 충실한 시들이 저지르는 잘못이다.
 
2행에서 생선은 곧 화자이다. 다시 말하면 죽음과 화자가 등가를 이룬다. 그리고 ‘저녁’을 바라본다. 그러나 ‘저녁’은 ‘생선의 것도 내 것도 아니다’라고 진술한다. 그렇다. 천 년 후에도 ‘저녁’은 그대로일 것이다. 생선과 화자는 유한적 존재로 소멸될 것이지만 ‘저녁’은 남는다. 단 2행의 짧은 시가 생사의 문제를 이처럼 극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 누구도 ‘저녁’의 주인이 될 수 없다.


홍일표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문화저널21 2012.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