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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사랑하다

#056_염혜정,『서봉 氏의 가방』

 

 

 

 

 

하악하악 숨을 몰아쉬어본다. 여전히 가슴이 답답하다. 이 체증은 도무지 내려갈 기색이 없다.

 

『서봉氏의 가방』은 어느덧 생의 바늘이 오후로 넘어가는 독자에게 저녁의 쓸쓸함에 충분히 젖어보라고 권한다.

 

시작부터 “몸은 작고 내부는 두터”운(「문고판 하이틴 로맨스-주원에게」) 시집 『서봉氏의 가방』은 한 권의 절망이다. 낡음의 어휘들이 넘친다. “아들은 고작 아비가 되”(「뿌리내리는 아버지」)기 위해 ‘휘청거리’고, ‘흔들’리고 ‘늙어’가, “허파꽈리처럼 웅크”(「바람의 목회」)린다. ‘가건물촌의 동거’처럼 ‘실낱같은 금들’(「플라시보 당신」)을 키웠을 뿐, 결국 ‘절망들이 마중 나와 있’는 (「불심검문」) 정류장에 서 있다는 걸 깨닫는다.

 

『서봉씨의 가방』은 책의 표지처럼 우울하다. 낡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고뇌의 빛깔이다. 끊임없이 담금질하고 연마하여 “아주 탱탱한 풍선을 타고 하늘에 닿는 꿈”(「플라시보 당신」)에 부풀어 들었던 새 가방은 세상의 바람들과 만나 헛된 곳을 다니기도 했고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면서 시나브로 낡아버렸고 쓸쓸해졌고 그나마 담겨있던 약간의 희망조차 수시로 쏟아버리고 말았다. 내가 그동안 가방에 집어넣은 시간들은 어디로 갔을까? “서봉氏의 바깥으로 규정된 실체”(「서봉氏의 가방」)인 현실과 관념 속에 존재하는 자아를 한 가방 안에 잘 개켜 넣을 수는 과연 없는 것일까?

 

어느 곳을 열어도 “고단한 주어들이 부드럽고 아픈 묘혈 짓는”(「폭설」) 책갈피 마다 ‘잔돌처럼 쓸쓸’(「서봉氏의 가방」)한 당신이 보인다.

 

당신이 고개 떨구고 막막하게 서 있는 오후, 시인의 문장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가슴의 체증이 내려가기를 기다리는 독자가 있다. 도무지 먹먹함으로 가득 찬 저녁은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시사사  2012년 3-4월호  ㅣ  염혜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