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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사랑하다

#057_조동범,「나의 늙은군대는 -시의 나라」 리뷰

 

 

 

 

 

 

천서봉은 군대라는 매개체를 통해 세계 밖으로 유배된 것들을 호명하고자 한다. 그에게 군대는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그의 군대는 “늙은 군대”이며, 그것은 “저녁의 추억”이며 “누렁이가 지키는 놋쇠그릇의 둥근 상처 같은” 것이다.

 

나의 늙은 군대는, 사람들 가끔씩 올려다보는 저녁의 추억,

그 추억을 일시에 점령하는 붉은 구름의 영혼 같은 거

착한 상인들을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저녁의 셔터음처럼

드르르륵 발사되는 단호한 외침 같은 거

 

나의 군대는, 수명을 모르는 빈 마당의 촉수 낮은 전구와

그 전구가 지배하는 평상의 낡은 네모와

네모가 만들어내는 엄격한 그림자에 놀라 커엉컹 짓는

개 한 마리, 누렁이가 지키는 놋쇠그릇의 둥근 상처 같은 거

 

-천서봉 「나의 늙은군대는 -시의 나라」부분

 

시인에게 시는 더 이상 힘의 표상일 수 없다. 그래서 그의 군대는 더 이상 군대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시인에게 시의 세계는 애초의 모든 힘의 원천이자 삶의 근거였을 것이다. 시인이 가치를 두는 것은 시의 세계이며, 그것이야말로 우리 삶을 보듬고 이끌어주는 것라고 시인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힘을 잃고 소멸에 이르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슬프고 쓸쓸하다고 말하고 있다.

 

후회스러운 것은 때때로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거

점호 나팔 혹은 그 소리를 닮은 노트에 적힌 긴 주어들을

자꾸만 잃어버렸으므로, 달큰한 잠이 조금씩 회군하던

내 머릿속 위태한 연안으로부터의 어떤 망명-

 

그리하여 홀로 남겨진 외로운 抒情의 가치가

시월의 빽빽한 숲 속으로 우리를 이끌었다는 거

 

그러나 나의 늙은 군대는, 그 숲의 백양나무처럼 서서

낡은 고독을 기억하고 고독의 처음 느낀 입술을 기억하네

언제든 불러 모을 수 있는 이 가난하고 슬픈 기운들,

나는 지금 노을 지는 쪽에 자리 잡은 어떤 작고 오래된 제국을 보네

 

-천서봉 「나의 늙은군대는 -시의 나라」부분

 

천서봉은 시를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호명한다. 그럼으로써 우리 삶이 잃어버린 보다 근본적인 것들을 환기하는데, 그러나 시인이 호명하고자 하는 것들은 “위태로운 연안으로부터의 어떤 망명”이나 “시월의 빽빽한 숲”에 놓임으로써 소명에 이르는 운명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낡은 고독”과 “고독의 처음 느낀 입술”을 기억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시인은 그것을 “가난하고 슬픈 기운”이라고 말한다. 직설적인 화법을 통해 나타나는 시인의 발언은 우리 삶이 잃어버린 것이라는 모호함과 결합하여 오히려 구체적 상징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시인은 이 모든 것들을 “노을 지는 쪽에 자리 잡은 어떤 오래된 제국”으로 인식한다. 시인이 보여주는 “제국”과 “군대”는 보편적으로 인지되는 폭력과 부정의 상징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언젠가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던, 그러나 이제는 힘을 잃어버린 시의 세계이자 우리가 꿈꾸어 왔던 세계로부터의 망명인 것이다. 시인은 잃어버린 세계를 호명함으로써 그것의 복원을 간절히, 그러나 쓸쓸히 꿈꿈고 있다.

 

 

『시인시각』 2011년 겨울호 ㅣ 조동범 시인

 

 

[단상]

이 모든 것은 다 찬란한 빛이다 그리고 빚이다.

사람이라면, 빚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집을 내고나서야 시 쓰는 일이 빚을 만드는 것임을 알았다.

더 외롭겠지만,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