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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사랑하다

#058_[천서봉]몽공장

 

 

 

 

 

[천서봉]몽공장

 

 

1
한번은 푸른 저녁을 걸어 달빛의 지분을 받으러 갔었다

저수지에서 추방된 연밥들은 연신 기관총처럼 총신을 돌리고 있었고 긴 잡풀들의 군무 사이에서 행과 열에 숨어살던 우리를 발견했다 불쌍한 것, 여기 있었구나, 한 줌의 빛을 분양받아 평생 쓰리라던 새벽은 죽고 대신 긴 다리를 가진 상징들이 기린처럼 뛰어다녔다

예언도 폭로도 없는 순한 늑대가 꾸는 양떼를 향한 신경증

2
여름은 불행한 구름들을 양산해 냈고 우기엔 근처 과자공장에서 쏟아내는 냄새가 온 동네를 점령했다 아이들은 좀비처럼 골목을 쏘다녔고 모두 피에로처럼 웃고만 있었는데, 나는 상처 난 집을 주머니에 넣고 종일 그 집만 어루만졌다 모서리가 닳아버린 하늘이 벌겋게 덧나곤 했다 할머니가 연근을 조리는 동안 언덕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던 늑대의 눈에 비친 풍경이었다 우리에게 똑같은 슬픔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불쌍한 것,

가자, 엄마에게 데려다 줄게

3
그렇지요, 꿈이란 그런 것이지요
여름이 창문을 쥐고 흔들었지만, 창문은 바람만 기억하는 것
바람을 한 사람으로 바꾸어버리고
결국엔 그 사람조차 관념으로 바꾸어놓는 것

내가 꿈꾸었던 당신도 결국은 그랬습니다
언덕에 올라 내려다보면 구름에 해가 가린 몇몇 집들을 볼 수 있었지요
눈이 없어서 아름다웠던 시절, 그래서 당신을 마음에 묻었습니다

4
마음은 심장에 있나요? 머리에 있나요? 생각해본 적 있다면 당신은 오늘 잠들지 않는 공장에 들러 꿈을 길어 올리는 공원의 긴 손가락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노을에 잘 익은 창문과 바삭바삭한 타일로 구워진 심장 같은 곳, 아니, 그냥 허름한 신발주머니처럼 생겼을지도 모르지요 우리가 잠든 사이 더 바쁘게 돌아가는 공장, 그래 그곳을 불면의 공장이라고 부릅시다 금새 구름이 되는 연기처럼 꿈은 내게 스몄다가 나를 떠나고 우리에게 스몄다가 우리를 떠나니까요

5
깨어나면 내 젖은 머리맡도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을까
지금도 소란한 부품들이 조립되는 공장에서의 하루
어제를 그제와 조립하고 그녀를 그와 조립하고
자의식을 환각과 조립하고 정치를 손가락과 조립하는……
너무도 완벽한 그 불완전체의 계절,
그 계절에 다시 꼬리가 돋아나면 우리, 텅 빈 미궁의 혹은 자궁의
따듯한 물 속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6
한번은 푸른 저녁을 걸어 달빛의 지분을 받으러 갔었지요
당신도 받았나요?

생면부지의 사람을 죽이고 돌아오던 저녁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였던 걸음 같은 거, 목성을 끌어당기고 싶던 거, 오래 전에 잊은 사람들 데려다가 함께 빵을 먹게 하는 그 슬픔들
 

 

 

 

문학동네 ㅣ 2012년 봄호


[단상]

살아가는 일은 늘 전쟁의 연속이다

언젠가 평화로운 날이 올거라고 그때 들춰보겠다고

고이 덮어둔 아름다운 사람이나 날들 위에 고요히 먼지가 쌓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