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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사랑하다

#059_[천서봉]비무장지대

 

 

 

 

[천서봉]비무장지대

 

 

 

지겨운 머리통을 욕조에 넣고 질식시킵시다

얼룩처럼 지워지지 않은 당신을 표백제가 담궈둡시다

나의 권태, 당신의 음모, 우리의 이데올로기

검은 물이 다 빠져버린 새벽에는 휴가를 떠납시다

하늘을 자를 만한 커다란 가위를 준비하고 당신을

오직 당신에게서 오려봅시다 그리고 돌진합시다 벽을 향해

뾰족한 끝만 생각합시다 당신의 머리핀 걷잡을 수 없는 무덤

우물의 천정까지 가 닿는 날카로운 촉(觸), 거기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린 물방울로 밥을 지읍시다

목구멍에 평화로운 천막을 치고 오래 죽읍시다

빼곡히 설치된 트랩에 즐거이 발목을 끼워 넣고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핏물을 받아 음료수를 만듭시다

제가 가겠습니다 자끄린느의 눈물을 흥얼거리며 썩은

빵가게를 들러서 가겠습니다 만찬을 준비합시다

맞불을 준비합시다 이번 주 금요일입니다 월요일이어도

관계없습니다 흔해빠진 저녁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립시다

소용돌이칩시다 소침한 뇌의 단면, 무의식의 들판에선

새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르겠습니다
 

 

 

 

시로여는세상 ㅣ 2012년 여름호


[단상]

시집을 내고 봄호와 여름호에 스무편 가까운 시들을 내보냈다 

청탁을 준 분들께 보답하는 길은 좋은 시를 발표하는 길 뿐이다

 

한동안 시를 그만 쓰고싶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시를 계속 쓰는 일은 시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재차 확인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 당연한 결과를 뒤집어 줄 무언가를 나는 자꾸 희망하고

그리고 당연한 결과의 부재때문에 좌절한다

 

오늘도 시를 쓰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한다

이 부질없음, 부질없음의 지루한 반복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