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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사랑하다

#061_신진숙, 죽음에 대한 상상과 시쓰기의 차원들

 

 

 

 

 

미메시스적 차원에서 본다면, 죽음은 일차적으로 삶의 반영이다. 삶 자체를 형상화할 뿐만 아니라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가령 죽음은 삶의 무의미성을 표상한다. 삶에 대한 허무의식을 드러낸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한 죽음을 부정적 현실인식 및 비판정신과 결합하는 것이다. 또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죽음은 마지막을 향한 초극의지로 구현되기도 한다. 즉, 현실 자체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의 눈을 상징한다. 이 경우 죽음 의지는 삶의 의지와 분리되지 않는다. 타나토스적 충동들은 그 자체로 생을 향한 욕동들에 접속됨으로써 의미를 지닌다. 죽음이 삶을 더욱 충만하게 하는 본질적인 요소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는 죽음을 통한 삶의 회복이라는 변증법적인 글쓰기의 한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죽음은 세기말적 징후들로 해석되기도 한다. 세기말적 분위기로 번역된 세계의 죽음은 현실 공간 자체를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즉, 세기말적 죽음의 징후들은 삶 자체를 미메시스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패배주의적 분위기 안에서도, 세계에 대한 저항정신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천서봉 시인의 징후들 과 더불어 이천년대 시를 독해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이것은.

 

 

지금 없는 것들은 모두 이제부터 올 것이다

 

네가 나에게 폭발이 고요에게, 자주 알 수 없는 문장들이 머리맡까지 밀려오거나 발목을 적셨다 그것들을 전생처럼 안고 자다가 하찮아진 우리의 기적이나 질문은 광화문 사거리에서 앞다투어 낡아갔다

 

비유를 사랑하던 나보다 더 나답던 애인은 새벽에 갑작스런 이민을 떠났고 굴뚝에선 연기가 소문에선 아이가, 끊임없이 자라났다 상징했다 드라마에선 종말이가 현실에서는 말종이,

 

어제 태어난 계단은 아름답지만 세기말을 넘긴 우리는 내일 읽을 동화를 준비하지 못했다 거리에는 고요의 귀를 접고 불행을 기다리는 택시들이 납작납작 엎드려 있다

 

너무 많은 산책은 비대한 연민을 출산할 것이고

 

늘 안아줄 팔이 그리웠으므로 다음 세기에는 팔이 세 개인 아이들이 태어날 것이다 나는 내일의 네 발가락을 닮아서 슬프다

 

          -천서봉, 징후들 『문예연구』 2012. 봄

 


'징후들'은 모든 변혁의 에너지가 일상성으로 귀화하는 아이러닉한 현실을 표상한다. 즉, 징후는 과거와 미래사이의 공백을 암시한다. 세계를 향한 물음들과 결합한 어떤 모종의 집합적 에너지의 폭발이 존재했던 과거와 '다음 세기' 사이의 빈 곳. 일상세계의 위대함은 심지어 혁명마저 어떤 일도 일어난 적 없는 것처럼 흡수해 버릴 수 있다는 데 있다. 혁명은 일상을 이기지 못한다. 모든 것은 일상 세계의 무한한 반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낡아간다. 모든 '상징'과 '비유'들이 '하찮'아지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나 계기가 필요치 않다. 세기말 정신도 결국에는 낡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일상은 어떤 소란도 삼켜버릴 수 있는 거대한 '고요'의 무덤과도 같다. 일상세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이 세계 내에는 없다. '내일 읽을 동화'를 쓰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징후들은 그러므로 죽음의 징후이자 현실의 증환들이다. 새로운 것이 태어날 전망이 없는 세계에서 모든 삶은 이미 낡은 것으로 변질된다.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은 '팔이 세 개인 아이들이 태어'나는 불구의 미래뿐이다. 즉, '종말'의 풍경은 그 자체로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세계의 불모성을 미메시스한다.

 

 

신진숙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