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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내리는 아버지

#065_[조동범]붉은 뱀과 숲과 우물의 저녁

 

 

 

 

[조동범] 붉은 뱀과 숲과 우물의 저녁

 

 

그리고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자
붉은 뱀의 무리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도시의 외곽에 있는 숲은
붉은 뱀의 무늬로 가득 차올랐다
웅덩이에 박힌 소년의 다리를 지나
소년의 몸통과 머리에도 붉은 뱀의 길이 들어섰다
붉은 뱀의 길을 향해 구름이 다가선다
소년은 손바닥을 펼쳐 붉게 물든 뱀의 길을 굽어보고 있다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는 저녁이었다
신발을 고쳐 신는 소년의 등 뒤로
검고 물컹한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구름이 지나가고 썩은 물고기가 떠오르는
웅덩이의 밤이었다
소년의 눈에서는 딱딱한 고름이 흘러나왔다
소년은 누렇고 딱딱한 눈을 들어
붉은 뱀과 구름이 번지는 소리를 바라보았다
두꺼비가 해를 먹어 삼키고 있는 밤이
숲을 향해 서늘하게 들어서고 있었다
숲은 오래된 우물을 길어 올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우물 속에는 하반신이 벗겨진 소녀가
우물의 깊이를 바라보며 피를 흘리고 있었다
두꺼비는 소녀의 등에 앉아
검고 물컹한 해를 토해내고 있었다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는 저녁이었다
소년의 눈을 향해
구름이 지나가고 썩은 물고기가 떠오르는,
붉은 뱀이 돋아나는
오래된 숲과 우물의
저녁이었다

 

 

 

조동범 ㅣ『카니발』 문학동네

 

 


[단상]


시집 전체에 카니발과 죽음이 가득하다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웃음과 죽음들,

그 위에 그로테스크한 풍경들이 토핑처럼 얹혀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이 그의 '카니발'과 뭐가 다른가

나의 웃음과 당신의 울음이 언제라도 자리바꿈할 기회를 엿보는

이 살풍경의 사회 속에서

도대체

우리는 언제 행복할 것인가

어떻게 행복해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