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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사랑하다

#066_현대시학작품상 심사평 中

 

 

 

현대시학작품상 심사평 中

 

<전략>

 

천서봉의 작품들은 앞에서 언급한 두 시인들의 추상화된 언어공간에 비해서 이따금 일상적이다. 이 시인이 그려내는 일상의 수평선에서 출몰하는 관념이 오히려 신선했다. 그 선도는 이 시인이 관념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난 데서 유래한 것 같았다. 천서봉 시인의 관념 조작이 은유와 결합하는 이음새를 살피며, 문득 <관념이란 은유의 잔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니체의 말이 떠올랐었다. 이 시인의 작품세계는 그의 실험성에도 불구하고 파탄없이 깨끗하게 마무리되는 질서가 돋보였다. 앞에 든 두 시인들 세계의 대척점에 자리한 이 시인이 보여줄 앞으로의 변용이 어떤 전개를 보일지 궁금하다

 

- 시인 허만하

 

 

 

[천서봉]과잉들



그해 겨울엔 속죄하듯 폭설 내렸고 별처럼 나는 여러 번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밤거리, 고깔모자의 가로등을 쓰고 걷다가 어느새 내가 어두워졌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평생 미안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그때마다 한 겹의 옷을 더 껴입었던 셈입니다


하루는 따뜻한 걱정들을 불러다 거한 저녁을 먹이느라 나는 한 숟가락도 뜨지 못했습니다


길을 잃은 문자들을 수소문하다가 내 마음에도 골목의 무늬 같은 더딘 손금이 여럿 생겼습니다


웃을 때도 울 때도 항상 곁에 살던 수많은 엄마들, 엄마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랑그인 적 없었습니다


망상과 식욕 사이 봄비가 붐빕니다 참 많은 당신인 것을 알겠습니다 아픔이 몰라볼 만큼 나는 살찌겠습니다


몸이 되기를 거부하는 거대한 결핍으로, 당신이 의식하지 않는 소소한 배경으로 천천히, 나를 소멸해 가겠습니다 



현대시학 ㅣ 2012년 8월호


[단상]


한번도 뵌 적 없는 어떤 시인으로부터 받는 편지는

말하자면 '빛' 같은 거다

내가 참 좋아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시인은 그나마 낫다

말 한 마디 섞어보지 못한 혹은 기약도 없는

그런 시인들이 내게는 너무나 많다

그럼에도 이렇게 가끔씩 건네주는 손길을 받을 때엔 황송하기 그지없다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할 수 있는 시간들이 오길 바란다

 

두 번째 시집을 낼 수 있다면

처음보다 조금 덜 부끄럽기를 바란다

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