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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내리는 아버지

#067_[이은규]점등(點燈)

 

 

 

[이은규]점등(點燈)

 

 

책장을 넘기는데 팟, 하고 전구가 나갔어요 밝기의 단위를 1룩스라고 할 때 어둠의 질문, 당신의 밝기는 몇 룩스입니까 탐미적인 어느 소설가는 소셜리즘이 수많은 밤을 소모시켰다고 불평했어요 그토록 와일드한 오스카 이야기, 안타깝지만 그는 빈궁을 벗 삼아 죽어갔어요 뜻밖에도 오늘의 밑줄은 성서의 한 구절,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다
 
우리가 혁명의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세상이 점등될 거라 선언해요

 

때로 이상한 열기에 전구 내벽이 까맣게 그을리기도 할 거예요 어둠의 공기를 잔뜩 마신 시인의 폐벽(肺壁)처럼, 그럴 때 필라멘트는 일종의 저항선으로 떨려요 가는 필라멘트 같은 희망으로 아침을 켤 수 있을지 귀 기울여요 고백하자면 세상을 글로 배웠습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면, 오늘의 밝기는 몇 룩스입니까

 

 

이은규 ㅣ『다정한 호칭』 문학동네

 

 


[단상]


그러니까 어떤 글은 화자가 글 속에 녹아 미쳐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건 글의 논리나 비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어서
그 단어와 그 문장이 아니면 빠져들어갈 수 없을 듯한
아주 묘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충분히 아우라라고 불러도 좋겠다

 

이은규 시인을 알고 있다는 한 소설가를 만난적이 있다
'글이 어느 순간 확 좋아졌더라' 고 했다 그는,
'그렇죠 그렇죠' 나는 그저 한참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올해는 좋은 시집이 유난히 많았는데, 그 중 이은규의 시집은
발간을 오래 기다린 시집이었고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은 시집이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시들은 짧은 시간에 읽고 끝낼 수가 없다
문장의 이면에 숨어있는 고뇌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함께 읽힌다

언젠가 보았던 아주 짧은 순간, 그녀의 눈빛이 그러했듯

 

좋은 시인들에게 늘 건네는 말이지만
그녀의 문운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