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너무 오래 사랑하다

#068_[천서봉]질서들

 

 

 

 

[천서봉]질서들

 

 

1 뒤에 2가 앉아 있었다 언제나 3은 2의 뒤에서 까치발로 서 있다 그 말랑말랑한 얼굴들 틈에 나도 당신도 K도 있다 추운 아침에 당도하는 편지는 언제나 침묵에 관한 것이다 묵언의 동선들, 가령 긴 얼음 상자가 火葬爐로 향하고 그 뒤를 검은 그림자들이 줄을 잇는 그런 풍경, 化粧하는 일은 피로하지만 문득 날아온 부고와 악수하고 꽃들은 서서히 죽어나갔다 사라지는 현실은 아름답다 그 어떤 질서도 없어 보이는 문장에 없는 것은 질서가 아니라 현실이므로, 목 졸리는 현실은 아름답다 꽃 핀 뒤에 눈 오는가 눈이 내린 뒤에 꽃 피는가 대답 없이 2는 1의 뒤에 앉아 흐르는 강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본 것이 당신인지 K의 뒷모습이었는지 구분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안도했다 추억하는 질서란 그랬다 1의 흉내를 내며 뒤돌아서 있는 4나 물구나무선 5에 대하여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건 이번 생에서 언급할 자세는 아니라고 腦皮부터 강물은 얼기 시작했다 K의 편지를 받은 날 아침 나는 연한 물고기로 서서 당신의 장례식에 입고 갈 검은 양복을 다리고 있었다 강박의 옷을 걸친 순서들, 먼저 사라지는 2나 3의 얼굴은 아름답다고 답장을 쓰고 내가 만든 가장 질서 있는 문장이라 추신했다 내가 아는 현실이란 겨우 그런 것이었다 함께 묻어주고 싶은 눈물은 그 겨울 어디에도 없었다

 

 

문예중앙 ㅣ 2012년 여름호


[단상]


언젠가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헤르더가 이런 얘길 했지 존경할 수 없는 수장 밑에서 일하는 것만큼 세상에서 불행한 일은 없다'고

 

오늘은 혼불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짝꿍이 한턱 쏜다는 날, K시인도 올테고, 내가 좋아하는 S시인도 올테지, 나는 오늘 저녁에 홍대 앞에 있을 수 있을까

 

나의 정신은 요즘 자주 분열 상태다 무엇이 나를 이런 곳으로 데려온 것일까 어떨까 가족들이 바라보는 나, 동료들이 바라보는 나, 나는 그들에게 내 생각만큼 비정상적일까

 

어젯밤엔 '미행'에 대하여 생각하느라 한 시간동안 멍하니 천정만 바라보며 누워있었지 한 시절을 쫓아 정신없던 그런 날들이 있었지

 

사진 에세이집을 위해서 C시인과 조만간 통화해야 한다 Y시인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두어야 한다

 

마임이스트에게선 아직 어떤 연락도 없다 즉흥적인 거리 공연에서 나는 과연 시인 다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