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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내리는 아버지

#077_[이이체]화장일기

 

 

 

 

 

[이이체]화장일기

 

 

지난 밤하늘과 저녁노을의 얼굴을 본받는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차피 얼굴들은 완벽할 수 없다. 부엌의 열린 창문으로 바람과 함께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내 얼굴처럼 희고 환하다. 엄마와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사타구니가 서서히 가렵고, 따갑기만한 내 털들. 엄마, 엄마를 엄마라고 부른 지도 너무 오래됐어요.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내가 엄마에게 말한다. 스킨로션과 마스카라, 파우더팩트, 비비크림, 짙은 쥐색의 아이라이너. 붉고 푸르고 하얀 알렙들. 어머니가 아끼는 노란 접시들이 채 맑아지지 않은 세제 거품들을 산란하고 있다. 엄마, 몇 톨의 방향제로도 꿈을 이룰 수 없어요. 화장한 내 얼굴이 맘에 들지만 역겨워서 몇 차례 토했고, 나는 내 불편한 베개만큼 날씬해지는 꿈을 꾼다. 거듭 거꾸로 돌게 되는 바람개비처럼 어지럽다. 이 정도면 어머니를 닮은 얼굴인가. 접시에 기생하는 세제 거품들이 여드름처럼 우악스럽게 익어간다. 새끼에게 밥을 주기 전 둥지를 교태롭게 맴돈다는 어미 새의 이야기는 꿈이 아닌 셈이다. 알렙들, 반복은 없고 부엌은 유년의 바람개비이다. 이 화장을 지우고 또다시 화장을 하면, 하나의 얼굴을 버릴 수 있을까. 고개를 돌린 태양이 창가로 들어와 무덤덤하게 접시들을 어루만진다. 어머니가 묻는다. 바람이 불고 있니? 세제로 립스틱을 닦으며 내가 대답한다. 아뇨, 내가 만드는 바람만 있습니다.

 

 

이이체ㅣ『죽은 눈을 위한 송가』 문지

 


[단상]

 

그 나이에, 그 나이 즈음에 쓸 수 있는 시가 있다

서른이 되어서 시를 시작한 내가 궁금한 것이 있다면

스무살에 내가 시를 썼다면 어떤 시를 썼을까 하는, 그런 것이다

젊은 시인들의 돌풍이 지난 한해를 몰고 지나갔다 내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 몇 시인이 있었다

고맙고 부럽다 고마운 건 젊은 시를 읽다보면 나도 나의 젊은 시절로 한번쯤 되돌아 갔다올 수 있어서고

부러운 건 이제 나는 더이상 저런 시를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