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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내리는 아버지

#079_[김병호]시

 

 

 

 

 

[김병호]시

 

 

내게서 증오를 훔쳐 가지 않고서야
미쳤다고 들풀은 수액을 끌어올려
이슬을 달았을까

 

기도에게 약속을 구걸하지 않고서야
미쳤다고 허공은 안개를 쥐어짜
한 획 휘파람을 날렸을까

 

무료하게 긴 복도를 서성이며
콧물을 빨다가 내장까지 들이마신
공복의 저녁을 낙타가 지난다

 

연기를 채집하는 아이가 지난다
어둠을 빼앗긴 그림자가 지난다
내게서 두려움을 추출해 스스로 땅거미 지는
미친 글자들, 심연의 야윈 잔등

 

 

김병호ㅣ『포이톨로기』 문동

 


[단상]

 

누가 내게 시의 끝은 어딘지 좀 가르쳐줄 순 없나?

그런 곳이 정녕 있기는 한가?

 

한 권의 시집을 다 읽고 난 뒤에

그 시집의 반도 읽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시집

그것이 병호형의 이번 시집이다

 

그런 사유로 나는 이 시집을 아마 조만간 다시 읽게 될 것이다

좋은 시가 많다 가령 '처음 본 가을' 같은 시들

내 것처럼 아껴두고 싶다

 

역시 시는 쉬운 시와 어려운 시로 나뉠 것이 아니라

깊은 시와 그렇지 못한 시로 나누어야 할 것이다

 

형은 나를 선생님이라 호명했지만

나는 병호형을 왜 형이라 부르고 싶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