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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내리는 아버지

#082_[허연]추전역

 

 

 

 

[허연] 추전역

 

 

부자연스럽게 날이 저문다.
아무 말 없이 그대는 여기서 하루를 끝내고, 그대 여기 누워 더 이상 시퍼런 바람이 되지 않아도 되겠지. 검은 빗물이 그대가 꾸는 꿈속을 흘러 땅으로 스며들기를. 다시는 빗물이 그대의 등을 타고 아프지 않게 흘렀으면.


나뭇가지 꺾어 계곡 물에 띄운다. 남겨진 그대 숨소리 검은 강과 함께 흘러가기를, 8월의 서늘함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꿈이기를.


여기엔 그대가 남고 나는 떠나서 죽어도 끌어안을 수 없는 그리움이
또 자갈들처럼 굴러다니기를.
그렇게 또 수만 년이 흐르기를.

 

 

 

허연ㅣ『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단상]

 

그립다거나 아프다거나 그런 단어들을 써도 괜찮은 것이 허연의 시다

어린 시절이나 옛이야기들을 해도 삼류가 되지 않는 것이 허연의 시다

독자적인 허여니즘이다

 

좋은 시들 앞에서는 말을 좀 참아도 좋다

허연의 첫 시집은

이성복, 조연호와 함께

내가 꼽은 3대 시집 중 하나다

이 3대 시집은 언젠가 또 다른 시집에게 자리를 내어 주겠지만

적어도 몇 년간 유지되어왔고 아마 앞으로의 몇 년도 그러할 것이다

 

시를 쓰는 일도 좋지만

실은 읽는 일이 더 좋다

읽을만큼 읽고 아무것도 써내지 않아도 된다면 좋겠다

시를 읽는 일이 무엇인지 숨을 쉬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