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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사랑하다

#087_[천서봉]아가미

 

 

 

 

 

[천서봉] 아가미

 

 

#a

 

사랑은 네 기억 속에서만 유효했던 어둡고 서늘한 혁명

 

아코디언 연주가 그렇게 시작되고

 

나와 너의 고막은 침묵으로 찢어졌다

 

다정한 매춘부들이 다가와 과거를 문진하고

 

읽을 수 없는 무늬들을 그려놓고 법사들이 떠나갔다

 

턱 밑에 모인 짐승들이 사라진 시간의 문장에 대해 연구했다

 

입에 물었던 물음표를 최초의 슬픔이라 기록했다

 

밤마다 살진 울음들이 줄줄이 딸려 올라왔다

 

 

#b

 

겨울이 발광했으므로 제법 잘 정련된 물고기의 비늘과 키스했다 아침부터 외로워져서 나는 이별한 애인에게 전화하고, 미친놈아 끊어, 끊어진 수화기에 대고 휘어진 물고기의 등뼈에 대해 읍소했다 수조는 부레를 갖지 못했고 물고기들은 내 눈의 연민을 참아내느라 분주했다 이빨 같은 다정多情이란 없었다 깨진 유리조각 사이 물고기의 뺨을 전생인 듯 쓰다듬었다 입을 벌릴 때마다 턱에서 소리가 났다 가릉가릉 목구멍은 붉은 춤의 고양이들을 게워 올렸다 누군가 내 턱을 열고 눈물을 꺼내가고 있었다 사랑이 뭔데? 처음 보는 구름이었다

 

창밖 임도를 따라 앰뷸런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시와미학』ㅣ 2012년 겨울호

 


[단상]

 

어느 순간도 회피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수 있다면 지금 그렇게 하고 싶다

 

눈이 내렸고 차 바퀴는 수없이 헛돌았다 어떤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문득 왜 우리는 이토록 견디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쌓이지 못하는 눈이 하늘 위로 올라가고 있다

 

외로움에도 계절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육화의 반댓말에 대해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