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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사랑하다

#090_[천서봉]매독을 앓는 애인

 

 

 

 

 

[천서봉] 매독을 앓는 애인

 

 

秋.

예감들이 가렵다 지난여름 물이 차올랐던 흔적이 누워있던 당신 배꼽부근에 선을 그었다 세월이 나를 여기 이앙(移秧)한 날들로부터 수없이 흘러간 바람의 지문들, 숨어있기 좋지요 숨어있기 좋다는 건 나에게서 가장 멀리 있는 어둠과 제일 가깝다는 말이니까요 근친은 가진 구름이 많아 비와 바람이 잦습니다 저는 사업자가 아니니 양도세만 물겠어요 구청을 돌아 나오며 우리가 물려받은 가장 아름다운 유산은 병이 아닐까 생각했다

 

冬.

태양은 책 속에서만 빛났다 금방 사라진다 공포가 기능하지 않는 악마는 내가 끼적이던 문장을 닮았다 서럽게도 그러고 보니 대체로 화분에 꽂힌 식물은 말이 적다 생각지도 않았던 생각들이 피어나는 감염의 계절, 병을 가지거나 혹은 잃은 다음에야 병은 온전한 우리의 것이 될 것이므로, 네게 달라붙어 있는 수많은 구름들을 나는 경배한다 너의 다리에 붉은 꽃 피어오를 때 눈 내리는 창문은 사랑하는 매미의 복안(複眼)처럼 흔들렸다

 

 

『시인동네』ㅣ 2012년 겨울호

 


[단상]

 

재수시절, 삼수하던 형을 만나 조졸한 저녁을 먹었다

또 한해가 간다고, 우리가 만난지 이제 23년이 되었다고,

종로당구장 이야기, 그 옆의 약령성당 이야기, 삼수공원 이야기

우리의 길고 긴 실패담들은 밥을 다 먹는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같은 반이었던 몇 사람들의 소식을 이야기했고

그들의 안녕을 빌었다

형도 참 안 변한다, 그러나 그런 로맨티스트가 나이들어 펀드매니저가 되었다

삶과 삶의 방향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나고

우리는 그 균열을 통해서 건너편의 또다른 나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