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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내리는 아버지

#042_[이성렬]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

 




[이성렬]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

원하지 않는 여행을 나는 떠나 왔다
길 뒤편으로 바람이 기차 바퀴를 굴리고 있었다
건축업자들은 카페에서 내일 지을 집을 얘기했지만
내 수첩에는 아무 일정도 적혀 있지 않았다
집 기둥 사이에 몇 명의 노예들이 누워 있었다
텅 빈 공원의 자작나무를 부둥켜안고 있는 딱정벌레 한 마리
어디선가 익숙한 몸짓으로 고양이가 지나갔다
그러나 나는 幼年에 대한 시를 쓰지 못한다
길 표지판들은 자꾸 돌아서며 허튼 약속을 하지 않았다
그날, S. Beckett의 깊게 패인 얼굴도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다


이성렬 ㅣ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 ㅣ 모아드림


[단상]
언젠가 어떤 시인의 출판기념회에서 이성렬 시인을 만난적이 있다. 그는, 펴낸 첫시집 만큼이나 깊은 눈매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55년생이라 믿기지않을 만큼 그의 시편들은 젊다. 시를 떠나있던 젊은 날들이 그의 늦은 시집을 묶어낸 까닭일 것이다. 이 시집을 읽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펴 낼 첫시집도 누구에겐가, 내가 알지 못하는 (단 한사람이어도 좋을) 누구에겐가 이토록 깊은 '몇 개의 단서'가 되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