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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내리는 아버지

#083_[유희경]면목동

 

 

 

 

 

[유희경]면목동


 
아내는 반 홉 소주에 취했다 남편은 내내 토하는 아내를 업고 대문을 나서다 뒤를 돌아보았다 일없이 얌전히 놓인 세간의 고요

 

아내가 왜 울었는지 남편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까 남편은 미끄러지는 아내를 추스르며 빈 병이 되었다

 

아내는 몰래 깨어 제 무게를 참고 있었다 이 온도가 남편의 것인지 밤의 것인지 모르겠어 이렇게 깜깜한 밤이 또 있을까 눈을 깜빡이다가 도로 잠들고

 

별이 떠 있었다 유월 바람이 불었다 지난 시간들, 구름이 되어 흘러갔다 가로등이 깜빡이고 누가 노래를 불렀다 그들을 뺀 나머지 것들이 조금 움직여 개가 짖었다

 

그때 그게 전부 나였다 거기에 내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건 남편과 아내뿐이었다 마음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유희경ㅣ『오늘 아침 단어』 문지

 


[단상]

 

서정시가 버림받는 시대에 서정시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옛정서도 이렇게 다시 감각적일 수 있음에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 근년에 읽은 시집 중에 가장 많은 모서리가 접힌 시집일 것이다

 

할 일은 많고 시간은 빠르게 겨울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쓸쓸한 아침, 나는 나를 믿지 못하는 나를 데리고 조금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