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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079_[김병호]시 [김병호]시  내게서 증오를 훔쳐 가지 않고서야미쳤다고 들풀은 수액을 끌어올려이슬을 달았을까 기도에게 약속을 구걸하지 않고서야미쳤다고 허공은 안개를 쥐어짜한 획 휘파람을 날렸을까 무료하게 긴 복도를 서성이며콧물을 빨다가 내장까지 들이마신공복의 저녁을 낙타가 지난다 연기를 채집하는 아이가 지난다어둠을 빼앗긴 그림자가 지난다내게서 두려움을 추출해 스스로 땅거미 지는미친 글자들, 심연의 야윈 잔등  김병호ㅣ『포이톨로기』 문동 [단상]  누가 내게 시의 끝은 어딘지 좀 가르쳐줄 순 없나? 그런 곳이 정녕 있기는 한가? 한 권의 시집을 다 읽고 난 뒤에그 시집의 반도 읽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시집그것이 병호형의 이번 시집이다 그런 사유로 나는 이 시집을 아마 조만간 다시 읽게 될 것이다좋은 시가 많다 가령 '처.. 더보기
#078_[임현정]없는 가게 [임현정] 없는 가게   금속성 침대에 누워 훅 하고 숨을 쉬면 벌어지는 일이란다 선반 위에는 반짝이는 틀니가 있지캐스터네츠처럼 경쾌한 리듬이란다 동그란 테이블에는 가족사진을 찍은 액자흰 구름을 터번처럼 두른 사내가 보이는구나 옷걸이 걸린 잿빛 양복도 어깨가 축 늘어져 있다담뱃재가 조금 떨어져 있는 주머니 속엔어제의 약속이 구겨져 있지 자명종 시계는 침대 발치에 있는 슬리퍼에 맞춰져 있단다검은 양말이 동그랗게 말려 있는 곳 등잔 갓 위의 먼지도귀퉁이가 낡은 가죽 가방도그대로 진열되어 있어 영원히 문을 열지 않는 가게한쪽이 꺼진 소파를 파는 가구점도 말이다 젖은 골판지 같은 하늘도 링거액이 곤두박질칠 때면 모두 없는 가게란다    임현정ㅣ『꼭 같이 사는 것처럼』 문동 [단상]  뭐랄까, 그녀의 시들은 동화.. 더보기
#058_[천서봉]몽공장 [천서봉]몽공장 1 한번은 푸른 저녁을 걸어 달빛의 지분을 받으러 갔었다 저수지에서 추방된 연밥들은 연신 기관총처럼 총신을 돌리고 있었고 긴 잡풀들의 군무 사이에서 행과 열에 숨어살던 우리를 발견했다 불쌍한 것, 여기 있었구나, 한 줌의 빛을 분양받아 평생 쓰리라던 새벽은 죽고 대신 긴 다리를 가진 상징들이 기린처럼 뛰어다녔다 예언도 폭로도 없는 순한 늑대가 꾸는 양떼를 향한 신경증 2 여름은 불행한 구름들을 양산해 냈고 우기엔 근처 과자공장에서 쏟아내는 냄새가 온 동네를 점령했다 아이들은 좀비처럼 골목을 쏘다녔고 모두 피에로처럼 웃고만 있었는데, 나는 상처 난 집을 주머니에 넣고 종일 그 집만 어루만졌다 모서리가 닳아버린 하늘이 벌겋게 덧나곤 했다 할머니가 연근을 조리는 동안 언덕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