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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_[천서봉]목요일 혹은 고등어 [천서봉] 목요일 혹은 고등어 그곳에서는 진화하지 않는 동선을 등에 문신하고 그것을 파루罷漏라 부르더이다 관념의 저수지로 다가와 물만 먹고 달아나는 다람쥐의 소슬한 걸음걸이 희미한 의식이 홀로 인적 없는 새벽을 배회하는 휑뎅그레한 풍경 어둠이 창궐하는 길을 따라 흉가의 방문榜文을 모사하는 문장들 한 마리의 네모 두 마리의 동그라미 세 마리 푸른 등뼈가 달빛에 탄다 그곳에서는 한낮에 귀소하는 몽마의 마중조차 역역力役이라 하더이다 『시와미학』ㅣ 2012년 겨울호 [단상] 하루하루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시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시를 쓰고 다듬는 일을 통해 나를 다듬고 다스리는 일을 배울 수 있었으면 한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사랑이라고 이번이 나의 마지막 시가 될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번번히 속으면서 .. 더보기
#093_[이해존]녹번동 [이해존] 녹번동 201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단상] 이 글을 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마음 고생이 누구보다 심했을 해존형의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길 빌면서... 새해의 첫날은 여전히 내가 신춘문예에 응모하던 그때처럼 설렌다. 누구는 당선의 영광을 안고 누구는 떨어지지만, 그건 오로지 문학하는 사람들의 기쁨이고 슬픔인 것이니까 시간이 흐르고 나면 모두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참으로 특이한 것은 나 역시 아직 발표하지 않은 녹번동이라는 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녹번동은 내가 스무살 넘도록까지 이십여년을 살았던 동네이고 그림의 가장 꼭대기에 고등학교시절 여자친구가 살았었다 형은 녹번동에 대하여 어떤 추억이 있는지 문득 궁금하다 조만간 만난다면 물어볼 수 있을까 같은 장소에 대한 서로 다른.. 더보기
#092_미니카에 대한 추억 #092_미니카에 대한 추억 늦은 밤에 잠은 안자고 미니카 사진을 찍는다 그러니까 미니카에 대한 추억은 거의 40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버지가 외국에 다녀오실 때마다 저런 미니카 몇 대씩을 사오시곤 했는데 초등학교 때인가 화가난 어머니께서 그것들을 다 갖다버릴 때까지의 10여년 동안 난 매치박스라는 영국제 미니카에 빠져살곤했다 그렇게 30년 넘는 세월이 지나고 어느날, 자동차를 무척 좋아라하는 딸아이에게 미니카를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베이를 뒤지는데, 거기는 내가 가지고 놀던 1970년대 초에 생산된 미니카들이 '레어'라는 명목하에 아직도 거래가 되고 있었다 빨간색 페라리, 핑크색 지프, 하늘색 보트, 이런 이런 바로 저거였는데... 지금은 매치박스를 만들던 마텔에서 핫휠이라는 새로운 메이커의 미.. 더보기
#091_[한우진]딸기 [한우진] 딸기  구름 때문에 바지가 흘러내렸다문장 하나가 완성되자꿀에 가까워지는 여자들,늑골 사이로 저녁놀이 삐죽거린다 만조에 다다른 밀밭의 아랫도리,여름의 발굽이 잇다홍을 퍼트린다어떤 문장이 증발하기 전에모자를 벗고 모자에유두만 골라 따 담았다  한우진ㅣ『까마귀의 껍질』 문학세계사 [단상]  그러니까 좋은 시는, 언제 읽어도 좋다아마 백 년 뒤에도 저 시는 그럴것이다 어제는 C시인과 J시인을 만나 저녁을 먹었다어려운 시기에 다시 일자리를 얻으셔서 다행이다 사람은 언제나 사람 때문에 힘들다그리고 내가 힘든 건 언제나 나 때문이다 미안하다 그리고 용서를 빈다다 나 때문이고 다 구름 때문이다 더보기
#090_[천서봉]매독을 앓는 애인 [천서봉] 매독을 앓는 애인  秋.예감들이 가렵다 지난여름 물이 차올랐던 흔적이 누워있던 당신 배꼽부근에 선을 그었다 세월이 나를 여기 이앙(移秧)한 날들로부터 수없이 흘러간 바람의 지문들, 숨어있기 좋지요 숨어있기 좋다는 건 나에게서 가장 멀리 있는 어둠과 제일 가깝다는 말이니까요 근친은 가진 구름이 많아 비와 바람이 잦습니다 저는 사업자가 아니니 양도세만 물겠어요 구청을 돌아 나오며 우리가 물려받은 가장 아름다운 유산은 병이 아닐까 생각했다  冬.태양은 책 속에서만 빛났다 금방 사라진다 공포가 기능하지 않는 악마는 내가 끼적이던 문장을 닮았다 서럽게도 그러고 보니 대체로 화분에 꽂힌 식물은 말이 적다 생각지도 않았던 생각들이 피어나는 감염의 계절, 병을 가지거나 혹은 잃은 다음에야 병은 온전한 우리의.. 더보기
#089_겨울밤 사실 난 사진 보다 카메라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최근 난 아주 오래된, 그러니까 정확히 언제인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시절에 생긴 카메라를 꺼내 여기저기 주변의 모습들을 담았다 좀 더 비싼 카메라, 좀 더 좋은 카메라가 좋은 사진을 만들어주지 않을까 조바심 내던 시절이 있었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서야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허름한 카메라에 눈이 가고... 수리점에 들러 죽어있던 노출계를 고치고, 셔터를 손보고 정작 내 카메라 가격보다 수리비가 더 비싸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젠 버릴 수조차 없는 카메라가 되었다 유난히 추운 겨울이다 대통령이 바뀌었고, 교육감이 바뀌었고 또 무언가 사람들의 마음도 바뀌어 갈 것이다 물음이 많아진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들, 비참한 한해였다, 고 적어둔다 영원히 잊기위해서 한동안은 .. 더보기
#088_[서대경]가을밤 [서대경] 가을밤 어느 가을밤 나는 술집 화장실에서 원숭이를 토했다 차디찬 두 개의 손이 내 안에서 내 입을 벌렸고 그것은 곧 타일 바닥에 무거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내렸다 그것은 형광등 불빛을 받아 검게 번들거렸고 세면대 아래 배수관 기둥을 붙잡더니 거울이 부착된 벽면 위로 재빠르게 기어올라갔다 나는 술 깬 눈으로 온몸이 짧은 잿빛 털로 뒤덮이고 피처럼 붉은 눈을 가진 그 작은 짐승의 겁먹은 표정을 바라보았다 나는 외투 속에 원숭이를 품었다 그것은 꼬리를 감고 외투 속 주머니 안에 얼굴을 파묻은 채 가늘게 몸을 떨었다 내 잔에 술을 채우던 사내가 놀란 눈으로 어디서 난 원숭이냐고 물었다 「구역질이 나서 토했더니 이 녀석이 나왔네」나는 잘게 자른 오징어 조각을 원숭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옆자리에 앉은 사내가.. 더보기
#087_[천서봉]아가미 [천서봉] 아가미   #a  사랑은 네 기억 속에서만 유효했던 어둡고 서늘한 혁명  아코디언 연주가 그렇게 시작되고   나와 너의 고막은 침묵으로 찢어졌다  다정한 매춘부들이 다가와 과거를 문진하고  읽을 수 없는 무늬들을 그려놓고 법사들이 떠나갔다  턱 밑에 모인 짐승들이 사라진 시간의 문장에 대해 연구했다  입에 물었던 물음표를 최초의 슬픔이라 기록했다  밤마다 살진 울음들이 줄줄이 딸려 올라왔다    #b  겨울이 발광했으므로 제법 잘 정련된 물고기의 비늘과 키스했다 아침부터 외로워져서 나는 이별한 애인에게 전화하고, 미친놈아 끊어, 끊어진 수화기에 대고 휘어진 물고기의 등뼈에 대해 읍소했다 수조는 부레를 갖지 못했고 물고기들은 내 눈의 연민을 참아내느라 분주했다 이빨 같은 다정多情이란 없었다 깨진.. 더보기
#086_[천서봉]목요일 혹은 고등어 [천서봉] 목요일 혹은 고등어 -가령, 사람만한 고등어 두 마리가 카페에 마주 앉아있는 그런 풍경, 사람들은 그 신기한 풍경에 놀라 사진을 찍어대고 둘은 아랑곳없이 서로의 대화를 이어가는, 그런 목요일 몸에서 물이 흘러 바닥을 적시듯 그렇게 만납시다 사탕이 잔뜩 묻은 궐련을 쥐고 수요일은 이르고 금요일은 조금 늦고, 그러니 목요일쯤 만납시다 새벽이 고인 사발을 들고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우리가 너무 늙어있을 터이니, 그러니 목요일쯤 만납시다 어제까지의 등푸른 이별 이야기를 나누고 희롱 받은 혀와 살 몇 점을 술잔 두어 개에 나누어 담게 반쯤 마시고 또 반쯤은 거기 남겨둘 수 있게, 추분이나 동지 같은 근심의 귀를 이제 열어두게 수요일까지 우리가 살아남은 기적에 대해, 그건 거의 마법에 가까운 일이었다.. 더보기
#085_[천서봉]강점기 [천서봉]强占期 별들 무수한 마당에서 우리 나눌 것이 섹스 밖에 없었을 때 자니? 내가 너에게 물을 때, 여전히 내가 너를 잘 모를 때 별빛이 젖은 이마를 만지고 검은 씨앗의 근 미래를 점칠 때 그냥 웃어야 할까? 모아둔 알약의 유통기한이 막 지났을 때 피학이 피학의 뒤를 밟을 때 여태 우리가 비언(鄙言)일 때 신비한 병질의 몸놀림에 허기질 때, 하여 아직 견딜 만할 때 몽담(夢譚)같은 물고기 되어, 눈치 없이 예쁜 아가미가 되어 네 손에 연한 숨을 넘겨줄 때, 떨며,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나, 철없는 도둑처럼 흐느낄 때 『미네르바』ㅣ 2012년 겨울호 [단상] 사람은 자라는 것이다 키도 마음도 모두 다 자라는 것이다 죽는 날까지 자라야할 것이다 아름답지 못한 나는 더 자라야 할 것이다 나무처럼, 당신.. 더보기
#084_약현성당에서 약현성당에 갔었다 재수시절, 학원 앞에 있던 성당은 나를 닮아 늘 어딘가 절박했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내게 약현성당이나 삼수공원은 내 긴 하루처럼 불안하고 동시에 고요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열 명이 모이면 열 명 중에 가장 시끄러운 한 사람이었다 고요가 필요할 때마다 저기서 내 불안들을 이야기하곤 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지만 약현성당만은 꼭 한번 다시 가보고 싶었다 저무렵 내게 있어 건축과는 2지망에 불과했다 저 건물이 대한민국 최초의 고딕식 건물이라는 건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른 뒤 건축을 전공하며 알게되었을 뿐이다 그땐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나를 스쳐간 무엇인가가 훗날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사람도 때론 그러하다 그러나 어쩌랴, 중림동 약현성당으로부터 이십여 년의 세월이 훌.. 더보기
#083_[유희경]면목동 [유희경]면목동 아내는 반 홉 소주에 취했다 남편은 내내 토하는 아내를 업고 대문을 나서다 뒤를 돌아보았다 일없이 얌전히 놓인 세간의 고요  아내가 왜 울었는지 남편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까 남편은 미끄러지는 아내를 추스르며 빈 병이 되었다  아내는 몰래 깨어 제 무게를 참고 있었다 이 온도가 남편의 것인지 밤의 것인지 모르겠어 이렇게 깜깜한 밤이 또 있을까 눈을 깜빡이다가 도로 잠들고  별이 떠 있었다 유월 바람이 불었다 지난 시간들, 구름이 되어 흘러갔다 가로등이 깜빡이고 누가 노래를 불렀다 그들을 뺀 나머지 것들이 조금 움직여 개가 짖었다  그때 그게 전부 나였다 거기에 내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건 남편과 아내뿐이었다 마음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이.. 더보기
#082_[허연]추전역 [허연] 추전역 부자연스럽게 날이 저문다. 아무 말 없이 그대는 여기서 하루를 끝내고, 그대 여기 누워 더 이상 시퍼런 바람이 되지 않아도 되겠지. 검은 빗물이 그대가 꾸는 꿈속을 흘러 땅으로 스며들기를. 다시는 빗물이 그대의 등을 타고 아프지 않게 흘렀으면. 나뭇가지 꺾어 계곡 물에 띄운다. 남겨진 그대 숨소리 검은 강과 함께 흘러가기를, 8월의 서늘함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꿈이기를. 여기엔 그대가 남고 나는 떠나서 죽어도 끌어안을 수 없는 그리움이 또 자갈들처럼 굴러다니기를. 그렇게 또 수만 년이 흐르기를. 허연ㅣ『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단상] 그립다거나 아프다거나 그런 단어들을 써도 괜찮은 것이 허연의 시다 어린 시절이나 옛이야기들을 해도 삼류가 되지 않는 것이 허연의 시다 독자적인 허여.. 더보기
#081_빗소리가 그립다면, 티스토리 배경음악 넣기는 참 어렵구나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음악이 끊기는 것때문에 이리저리 바꾸어보다가 그냥 첨부해 두기로 한다 필요할 때마다 빗소리가 듣고 싶을 때마다 81페이지를 열어서 듣기로 한다 봄이 가면 봄이 그립고 여름이 떠나면 여름이 그리워진다 더보기
#080_당신 미쳤나요? -당신 미쳤나요? -네, 미쳤습니다 더보기
#079_[김병호]시 [김병호]시  내게서 증오를 훔쳐 가지 않고서야미쳤다고 들풀은 수액을 끌어올려이슬을 달았을까 기도에게 약속을 구걸하지 않고서야미쳤다고 허공은 안개를 쥐어짜한 획 휘파람을 날렸을까 무료하게 긴 복도를 서성이며콧물을 빨다가 내장까지 들이마신공복의 저녁을 낙타가 지난다 연기를 채집하는 아이가 지난다어둠을 빼앗긴 그림자가 지난다내게서 두려움을 추출해 스스로 땅거미 지는미친 글자들, 심연의 야윈 잔등  김병호ㅣ『포이톨로기』 문동 [단상]  누가 내게 시의 끝은 어딘지 좀 가르쳐줄 순 없나? 그런 곳이 정녕 있기는 한가? 한 권의 시집을 다 읽고 난 뒤에그 시집의 반도 읽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시집그것이 병호형의 이번 시집이다 그런 사유로 나는 이 시집을 아마 조만간 다시 읽게 될 것이다좋은 시가 많다 가령 '처.. 더보기
#078_[임현정]없는 가게 [임현정] 없는 가게   금속성 침대에 누워 훅 하고 숨을 쉬면 벌어지는 일이란다 선반 위에는 반짝이는 틀니가 있지캐스터네츠처럼 경쾌한 리듬이란다 동그란 테이블에는 가족사진을 찍은 액자흰 구름을 터번처럼 두른 사내가 보이는구나 옷걸이 걸린 잿빛 양복도 어깨가 축 늘어져 있다담뱃재가 조금 떨어져 있는 주머니 속엔어제의 약속이 구겨져 있지 자명종 시계는 침대 발치에 있는 슬리퍼에 맞춰져 있단다검은 양말이 동그랗게 말려 있는 곳 등잔 갓 위의 먼지도귀퉁이가 낡은 가죽 가방도그대로 진열되어 있어 영원히 문을 열지 않는 가게한쪽이 꺼진 소파를 파는 가구점도 말이다 젖은 골판지 같은 하늘도 링거액이 곤두박질칠 때면 모두 없는 가게란다    임현정ㅣ『꼭 같이 사는 것처럼』 문동 [단상]  뭐랄까, 그녀의 시들은 동화.. 더보기
#077_[이이체]화장일기 [이이체]화장일기  지난 밤하늘과 저녁노을의 얼굴을 본받는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차피 얼굴들은 완벽할 수 없다. 부엌의 열린 창문으로 바람과 함께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내 얼굴처럼 희고 환하다. 엄마와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사타구니가 서서히 가렵고, 따갑기만한 내 털들. 엄마, 엄마를 엄마라고 부른 지도 너무 오래됐어요.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내가 엄마에게 말한다. 스킨로션과 마스카라, 파우더팩트, 비비크림, 짙은 쥐색의 아이라이너. 붉고 푸르고 하얀 알렙들. 어머니가 아끼는 노란 접시들이 채 맑아지지 않은 세제 거품들을 산란하고 있다. 엄마, 몇 톨의 방향제로도 꿈을 이룰 수 없어요. 화장한 내 얼굴이 맘에 들지만 역겨워서 몇 차례 토했고, 나는 내 불편한 베개만큼 날씬해지는 꿈을 꾼다.. 더보기
#076_[이용임]안개 [이용임] 안개  바늘이 떨어진 시계가 걸린 좁고 흰 벽 앞에한 사람이 손으로 입을 막고 앉아 있다연기의 뼈로 세워진 창문은 일그러지며구름처럼 그의 이마에 격자무늬를 남긴다바람이 손잡이를 지워버린문들이 이 마을엔 드문드문축축하게 말린 소리만이웅크린 손바닥 속에서 조금씩 어두워진다  이용임ㅣ『안개주의보』 문지 [단상]  시에서결국 어느 순간이 지나면 다시 기교를 버리게 된다그것은 순수하게 자기자신과의 일이고누가 누구와 타협하거나 설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시는 결국 스스로의 요청에 의해 변화한단 이야기다 모르겠다 시인의 첫 시집을 읽으면서 왜 내가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현명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해 왔던 내가이 즈음 많이 흔들리고 있다 하긴 스스로를 현명하지 않다고 여기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그.. 더보기
#075_[천서봉]142번지 [천서봉]142번지 누구도 어제를 기다리지 않아서 쌓인 눈은 더러워진다 여섯 개의 조가비는 내가 당신에게 끌린다는 뜻이다 인어와 술꾼들은 오로지 죽음을 향해 헤엄쳐 간다 할머니는 대상을 초월한다 모든 것을 견뎌낸 기억은 말이 아니라 소리에 가깝고 그래서 詩에 가깝다 구름 자체, 그것은 구름이 아니어서 더욱 구름답다 오래된 골목에는 기억으로 축조된 굴뚝이 여전히 자란다 그건 소문의 것이지만 나도 조금은 소유하고 있다 상징이란 代身의 뒤에 숨어 조용히 홀로 우는 일 혼자인 것과 혼자가 아닌 것이 대개 다르지 않았다 『시와 경계』ㅣ 2012년 가을호 [단상] 어릴 적, 20년을 살던 거기는 지금의 거긴가, 지금도 거긴가? 기억에 빚을 진다는 것 이제 조금은 갚을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한 달간 두 번째 시집의.. 더보기
#074_[진은영]인식론 [진은영] 인식론 호랑이를 왜 좋아하는지 몰라요 작은 나무의자에 어떻게 앉게 되었는지 몰라요 언제부터 불행을 다정하게 바라보게 되었는지 정원사가 가꾸지 못할 큰 숲을 바라보듯 말이죠 언제부터 너의 말이 독처럼 풀리는지 몰라요 맑은 우물은 여기부터 하나, 둘, 셋, 이 낡은 의자에서…… 언제쯤 일어나게 될는지 몰라요 나의 둘레를 돌며 어슬렁거리는 녹색 버터의 호랑이들 대체 뭘 바라는 거죠? 몰라요 이 시를 몰라요 너를 몰라요 좋아요 진은영 ㅣ『훔쳐가는 노래』 창비 [단상] 그녀는 지금 무언가 견디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름에 받은 시집을 이제서야 겨우 정독하고 귀퉁이가 접힌 수많은 페이지들 중에 하나를 고른다 진은영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저런 시를 쓸 수 있단 말인가 더보기
#073_[홍일표]텍스트 [홍일표] 텍스트  달빛 아래 짐승들이 헤매고 다니는 눈 덮인 내설악은 너무 밝은 텍스트다 멧돼지는 달빛을 모르고 내설악은 멧돼지를 모르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캄캄한 것 그리하여 달빛과 내설악은 박물관의 유물처럼 밤새도록 심심한 것 그렇게 서로 다른 표정으로 멀어지는 동안 구두 굽처럼 고독한 것 왼쪽 가슴 아래 심장이 딱딱해지는 것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어두워지는 장르처럼  홍일표 ㅣ『매혹의 지도』 문예중앙 [단상]  등단 무렵에 읽었다면 이 시집을 이렇게 좋게 읽었을까 시의 살 보다는 시의 뼈가 더 좋아지는 요즘사랑도 변하고, 시를 보는 눈도 변한다세상 무엇이 변하지 않겠는가그러니 좋은 시집에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내가 새삼 부끄럽다 단, 우리가 올해 놓치지 말아야할 시집이 있다면 이 시집은 분명 .. 더보기
#072_[천서봉]Mass Study [천서봉] Mass Study 연한 발가락들을 작은 화분에 나누어 심고 겨울엔 거기서 자라날 커다랗고 슬픈 머리들을 기다려야지 비라도 오면 지루한 상상들을 마당으로 불러 처마 밑 낙수의 말줄임표들을 별의 간격이라 일러두겠네 기형처럼 솟은 새벽의 머리 단정히 깎아주는 건 허락의 몸에 허락을 하나 더 덧붙이는 일일 텐데 마당을 마당에게 돌려주고 아껴둔 광장을 비둘기에게 돌려주고 부러뜨린 물, 거친 단면에 내 검은 얼굴을 닦을 수 있다면 그런 아침은 분홍의 벌레처럼 소란하겠네 그 소리에 놀라 할머니가 살아오고 외삼촌이 돌아오고 통시적인 집에 모여 우리는 가문의 해체와 혼종을 노래하고 가계의 오랜 내력에 대해 공부하겠네 액자에서 오려낸 세월을 저녁의 가장 고운 부위에 걸어두고 불알 만지듯 외로움에 관하여 중얼거.. 더보기
#071_[조연호]귀종불역방(鬼腫不易方) [조연호] 귀종불역방(鬼腫不易方) 소중히 꿰인 날들이 바늘을 돌려주지 않으니까 아욱이 자라고 있었다 잔멸이 떠다니는 여름 코를 파고 파양(罷養)을 다했다 창애에 걸쳐 저희가 헛됨을 잃은 이 귀종(鬼腫)으로 연우(延虞)하소서 밤을 기어 다니는 잿빛 연기물(緣起物)이 있었지만 그 권 一은 낙질되어 비둘기가 토한 것 같이 되었다 너희 정상물은 이 변신물 위로 걸어오라, 불뢰자(不牢者)여 신이 자궁에 빠뜨린 발 한쪽은 우리 영혼의 합리이니 소금을 넣기 위해선 불순의 순도가 높아야 했다 악신일(惡神日)에, 사람의 풍식(風蝕)이 식기를 기다린다 몸에서 나온 변물(變物)을 끼얹은 곳에 아욱이 자라고 있었다 『문학 선』ㅣ 2012년 가을호 [단상] 그저 놀랍다, 이 시인은 어디까지 가려고 하는 것일까 歸宗을 鬼腫으로 .. 더보기
#070_[최승철]생각하고 있는 곰 [최승철]생각하고 있는 곰 낚싯대를 물고 간 물고기를 곰이라고 하자 심해의 색은 짙게 검푸른 동굴, 눈동자를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겁을 먹을 테니 파도에 거친 울음을 실어 보내는 곰의 포효. 곰은 바다에서 어떻게 상처를 발라낼 것인지 뼈마디가 드러날 때까지 입을 악물고 썩어가는 자신의 흉부를 묵묵부답으로 인내하는 자라면 백수광부처럼 분명 자맥질로 사라지게 될 것인데 곰은 바닷속을 자신의 입안이라 생각하며 끊임없이 숲을 헤쳐나가 물결의 파고를 나뭇가지 밀어내듯 앞으로만 갈 것인데 고개를 꺾어 자신의 등을 보지 못한 사람들 곽리자고가 노래 부를 때 곰은 당신이 품고 있는 반짝임 안에서 울음소리로 단 한 번에 잠원(暫原)의 모든 기억을 깨울 것인데 곰이 늘 지구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말 것 언제까.. 더보기
#069_[천서봉]나비 운용법 [천서봉] 나비 운용법 #a 홀로 나는 부끄러워 몇 번이고 얼굴을 감싸 쥐다 무릎 사이에 귀를 묻다 생각한다 죽고 싶다……, 이것은 다시 사춘(思春)인가 어떤 사랑도 아름답지 않고 어떤 중독도 마침내 시들해질 때, 나는 편견이 없는 연대의 한 마리 나비가 된다 : 그것은 두 치 정도의 생물로 마치 넓은 소매를 펄럭이듯 하늘에서 움직이는……, 이라고 목인에 의해 처음 기록된다 공중에서 누구도 살지 않을 때 나는 기괴한 음악이거나 오염되지 않은 공포다 영어(囹圄)에 든 채 당신에게 가거나 혹은 가지 못한다 가는 일이 부끄러워 못 가고 가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워 못 가지도 못하고 가지도 못하는 부끄러움으로 마침내 죽고 싶다고…… 나는 여러 번 처음으로 자살한 어떤 연대의 나비가 된다 : 그것의 불가해한 무늬는.. 더보기
#068_[천서봉]질서들 [천서봉]질서들 1 뒤에 2가 앉아 있었다 언제나 3은 2의 뒤에서 까치발로 서 있다 그 말랑말랑한 얼굴들 틈에 나도 당신도 K도 있다 추운 아침에 당도하는 편지는 언제나 침묵에 관한 것이다 묵언의 동선들, 가령 긴 얼음 상자가 火葬爐로 향하고 그 뒤를 검은 그림자들이 줄을 잇는 그런 풍경, 化粧하는 일은 피로하지만 문득 날아온 부고와 악수하고 꽃들은 서서히 죽어나갔다 사라지는 현실은 아름답다 그 어떤 질서도 없어 보이는 문장에 없는 것은 질서가 아니라 현실이므로, 목 졸리는 현실은 아름답다 꽃 핀 뒤에 눈 오는가 눈이 내린 뒤에 꽃 피는가 대답 없이 2는 1의 뒤에 앉아 흐르는 강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본 것이 당신인지 K의 뒷모습이었는지 구분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안도했다 추억하는 질서란 그랬다 1의.. 더보기
#067_[이은규]점등(點燈) [이은규]점등(點燈) 책장을 넘기는데 팟, 하고 전구가 나갔어요 밝기의 단위를 1룩스라고 할 때 어둠의 질문, 당신의 밝기는 몇 룩스입니까 탐미적인 어느 소설가는 소셜리즘이 수많은 밤을 소모시켰다고 불평했어요 그토록 와일드한 오스카 이야기, 안타깝지만 그는 빈궁을 벗 삼아 죽어갔어요 뜻밖에도 오늘의 밑줄은 성서의 한 구절,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다 우리가 혁명의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세상이 점등될 거라 선언해요 때로 이상한 열기에 전구 내벽이 까맣게 그을리기도 할 거예요 어둠의 공기를 잔뜩 마신 시인의 폐벽(肺壁)처럼, 그럴 때 필라멘트는 일종의 저항선으로 떨려요 가는 필라멘트 같은 희망으로 아침을 켤 수 있을지 귀 기울여요 고백하자면 세상을 글로 배웠습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면, 오늘의.. 더보기
#066_현대시학작품상 심사평 中 현대시학작품상 심사평 中 천서봉의 작품들은 앞에서 언급한 두 시인들의 추상화된 언어공간에 비해서 이따금 일상적이다. 이 시인이 그려내는 일상의 수평선에서 출몰하는 관념이 오히려 신선했다. 그 선도는 이 시인이 관념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난 데서 유래한 것 같았다. 천서봉 시인의 관념 조작이 은유와 결합하는 이음새를 살피며, 문득 는 니체의 말이 떠올랐었다. 이 시인의 작품세계는 그의 실험성에도 불구하고 파탄없이 깨끗하게 마무리되는 질서가 돋보였다. 앞에 든 두 시인들 세계의 대척점에 자리한 이 시인이 보여줄 앞으로의 변용이 어떤 전개를 보일지 궁금하다 - 시인 허만하 [천서봉]과잉들 그해 겨울엔 속죄하듯 폭설 내렸고 별처럼 나는 여러 번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밤거리, 고깔모자의 가로등을 쓰고 걷다가 .. 더보기
#065_[조동범]붉은 뱀과 숲과 우물의 저녁 [조동범] 붉은 뱀과 숲과 우물의 저녁 그리고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자 붉은 뱀의 무리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도시의 외곽에 있는 숲은 붉은 뱀의 무늬로 가득 차올랐다 웅덩이에 박힌 소년의 다리를 지나 소년의 몸통과 머리에도 붉은 뱀의 길이 들어섰다 붉은 뱀의 길을 향해 구름이 다가선다 소년은 손바닥을 펼쳐 붉게 물든 뱀의 길을 굽어보고 있다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는 저녁이었다 신발을 고쳐 신는 소년의 등 뒤로 검고 물컹한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구름이 지나가고 썩은 물고기가 떠오르는 웅덩이의 밤이었다 소년의 눈에서는 딱딱한 고름이 흘러나왔다 소년은 누렇고 딱딱한 눈을 들어 붉은 뱀과 구름이 번지는 소리를 바라보았다 두꺼비가 해를 먹어 삼키고 있는 밤이 숲을 향해 서늘하게 들어서고 있었다 숲은 오래된 우물을 길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