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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_[천서봉]결핍들 [천서봉] 결핍들 손가락이 네 개라서 슬픈 밤, 네 개의 손가락이 유언장을 쓰고, 마지막은 그렇게 오는데 도대체 누가 없는 건가요? 이 빈약하고 다복한 밤의 집회, 둘 씩 둘 씩 짝을 지어 생각할까요? 하나가 나머지 셋의 수장이 되면 어떨지요? 주먹을 쥐어봅시다 다시 손가락을 펴 보고, 가위를 만들어 봅시다 다 됩니다 이게 역사인건가요? 소용돌이로 만들어진 얼굴, 그걸 좀 가지런히 펼쳐봅시다 인식되지 않도록, 물이 되어 흐르도록, 물이 되어 흐르다가 갈래갈래 나누어진다면 그 또한 진실입니까? 다섯 개가 아닌 네 개로 사는 일, 하나가 사라졌지만 그래서 더 또렷해진 우리의 밤, 이것은 진실이 아닌 것과 거짓의 차이, 하나는 마지막까지 슬픔입니까? 손가락 하나를 잃긴 했는데 도대체 누가 사라진 건가요? 문학.. 더보기
#063_[천서봉]강박들 [천서봉] 강박들 그날이 그날의 당신이 버스가 꽃이 프랑소와즈 아르디가 스타킹이 프렉탈이 원숭이띠가 어떤 범론이 개론이 개목걸이가 요코 다와다가 바다가 이민이 파도가 너울이 두통이 호흡이 그렇게 울음을 제유하는 묵언들이 왈칵, 쏟아져 내리는 나의 본가(本家)엔 당신이 버리고 간 구두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돌아가는 지구가 있고 여전히 한 척의 배를 띄우지 못해 얕은 강가에서 놀고 있는 아버지가 있다 머리 흔들고 손 저어도 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몇 편 검은 햇살 같은 절망이 있고 그런 당신의 오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자진하여 부근이나 근처가 되어가는 발 저린 풍경이 있다 대문 밑 혓바닥처럼 밀려들어오는 고지서들, 참 더딘 고독들, 온다 안 온다 온다 안 온다…… 아직도 나의 현관엔 모든 결심을 물.. 더보기
#062_[천서봉]수목한계선 [천서봉] 수목한계선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구석에서 종일 연애했다 겉장을 문지르면 따뜻한 물이 흘러나오는 그런 시집은 없을까 고작 몸에 꼭 맞는 고독으로 예견되는 우리가 형이상학의 계통수처럼 마주 걸려있어서 잠깐 웃었다 표정처럼 숨겨지지 않는 행불은 없을까 미친 듯 자라 어디가 끝인지도 모를 그런 영혼보다는 절정에서 멈추어지는, 더 가지 않는, 표본 되는, 그런 따뜻한 불행은 없을까 어둠속에서 흩어진 성기와 찌그러진 유방을 찾아 입는 동안 형식을 얻지 못한 물음들이 따독따독 잎으로 돋는다 창문이 생략된 방에서 계절은 냉장고처럼 다시 돌고 우리는 이대로 남극까지 흘렀으면 싶었다 당신은 쓸쓸한 내 詩가 싫다했고 나는 사람인 내가 싫었다 시인시각 ㅣ 2012년 여름호 [단상] 이렇게 오래 아픈 여름은 난생 .. 더보기
#061_신진숙, 죽음에 대한 상상과 시쓰기의 차원들 미메시스적 차원에서 본다면, 죽음은 일차적으로 삶의 반영이다. 삶 자체를 형상화할 뿐만 아니라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가령 죽음은 삶의 무의미성을 표상한다. 삶에 대한 허무의식을 드러낸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한 죽음을 부정적 현실인식 및 비판정신과 결합하는 것이다. 또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죽음은 마지막을 향한 초극의지로 구현되기도 한다. 즉, 현실 자체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의 눈을 상징한다. 이 경우 죽음 의지는 삶의 의지와 분리되지 않는다. 타나토스적 충동들은 그 자체로 생을 향한 욕동들에 접속됨으로써 의미를 지닌다. 죽음이 삶을 더욱 충만하게 하는 본질적인 요소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는 죽음을 통한 삶의 회복이라는 변증법적인 글쓰기의 한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죽음은 세기말.. 더보기
#060_[천서봉]후생들 [천서봉]후생들 1. 또렷해지지 않는 생각들에 중독되어간다 어제 나는 당신에게 편지를 쓸 것이고 내일 나는 당신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禁書를 헌책방에서 발견했을 때 거기 내 아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수신하지 않는 안테나는 너의 성기다 나는 그만 슬퍼져서 무성생식의 벌레처럼 웃었다 어느 지하실에선가 새고 있는 수증기, 그 수증기의 참 착한 고독은 네 머리카락을 닮아 있다 목소리는 목도리로 퇴화한다 오늘 아침에도 커피를 마시다 조금 남겨두었고 분리되는 성분들은 별의 경로를 따라 휘어진다 2. 폐기되어야 하는 단어들에 관하여 우리가 담론할 때 나는 자주 빗방울처럼 끊어진다 탄환처럼 누군가 나를 찢는다 찢어진 구멍으로 햇살이 스미고 한 떼의 물고기들이 S자로 휘적거리며 들어온다 내가 부표처럼.. 더보기
#059_[천서봉]비무장지대 [천서봉]비무장지대 지겨운 머리통을 욕조에 넣고 질식시킵시다 얼룩처럼 지워지지 않은 당신을 표백제가 담궈둡시다 나의 권태, 당신의 음모, 우리의 이데올로기 검은 물이 다 빠져버린 새벽에는 휴가를 떠납시다 하늘을 자를 만한 커다란 가위를 준비하고 당신을 오직 당신에게서 오려봅시다 그리고 돌진합시다 벽을 향해 뾰족한 끝만 생각합시다 당신의 머리핀 걷잡을 수 없는 무덤 우물의 천정까지 가 닿는 날카로운 촉(觸), 거기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린 물방울로 밥을 지읍시다 목구멍에 평화로운 천막을 치고 오래 죽읍시다 빼곡히 설치된 트랩에 즐거이 발목을 끼워 넣고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핏물을 받아 음료수를 만듭시다 제가 가겠습니다 자끄린느의 눈물을 흥얼거리며 썩은 빵가게를 들러서 가겠습니다 만찬을 준비합시다 맞불을 준비합.. 더보기
#058_[천서봉]몽공장 [천서봉]몽공장 1 한번은 푸른 저녁을 걸어 달빛의 지분을 받으러 갔었다 저수지에서 추방된 연밥들은 연신 기관총처럼 총신을 돌리고 있었고 긴 잡풀들의 군무 사이에서 행과 열에 숨어살던 우리를 발견했다 불쌍한 것, 여기 있었구나, 한 줌의 빛을 분양받아 평생 쓰리라던 새벽은 죽고 대신 긴 다리를 가진 상징들이 기린처럼 뛰어다녔다 예언도 폭로도 없는 순한 늑대가 꾸는 양떼를 향한 신경증 2 여름은 불행한 구름들을 양산해 냈고 우기엔 근처 과자공장에서 쏟아내는 냄새가 온 동네를 점령했다 아이들은 좀비처럼 골목을 쏘다녔고 모두 피에로처럼 웃고만 있었는데, 나는 상처 난 집을 주머니에 넣고 종일 그 집만 어루만졌다 모서리가 닳아버린 하늘이 벌겋게 덧나곤 했다 할머니가 연근을 조리는 동안 언덕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 더보기
#057_조동범,「나의 늙은군대는 -시의 나라」 리뷰 천서봉은 군대라는 매개체를 통해 세계 밖으로 유배된 것들을 호명하고자 한다. 그에게 군대는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그의 군대는 “늙은 군대”이며, 그것은 “저녁의 추억”이며 “누렁이가 지키는 놋쇠그릇의 둥근 상처 같은” 것이다. 나의 늙은 군대는, 사람들 가끔씩 올려다보는 저녁의 추억, 그 추억을 일시에 점령하는 붉은 구름의 영혼 같은 거 착한 상인들을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저녁의 셔터음처럼 드르르륵 발사되는 단호한 외침 같은 거 나의 군대는, 수명을 모르는 빈 마당의 촉수 낮은 전구와 그 전구가 지배하는 평상의 낡은 네모와 네모가 만들어내는 엄격한 그림자에 놀라 커엉컹 짓는 개 한 마리, 누렁이가 지키는 놋쇠그릇의 둥근 상처 같은 거 -천서봉 「나의 늙은군대는 -시의 나라」부분 시인에게.. 더보기
#056_염혜정,『서봉 氏의 가방』 하악하악 숨을 몰아쉬어본다. 여전히 가슴이 답답하다. 이 체증은 도무지 내려갈 기색이 없다. 『서봉氏의 가방』은 어느덧 생의 바늘이 오후로 넘어가는 독자에게 저녁의 쓸쓸함에 충분히 젖어보라고 권한다. 시작부터 “몸은 작고 내부는 두터”운(「문고판 하이틴 로맨스-주원에게」) 시집 『서봉氏의 가방』은 한 권의 절망이다. 낡음의 어휘들이 넘친다. “아들은 고작 아비가 되”(「뿌리내리는 아버지」)기 위해 ‘휘청거리’고, ‘흔들’리고 ‘늙어’가, “허파꽈리처럼 웅크”(「바람의 목회」)린다. ‘가건물촌의 동거’처럼 ‘실낱같은 금들’(「플라시보 당신」)을 키웠을 뿐, 결국 ‘절망들이 마중 나와 있’는 (「불심검문」) 정류장에 서 있다는 걸 깨닫는다. 『서봉씨의 가방』은 책의 표지처럼 우울하다. 낡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더보기
#055_[천서봉]습관들 [천서봉]습관들 1. 모래를 씹으며 당신을 생각한다 잠깐이지만 아직도 이 별에는 꽃들이 지고 핀다 어느 순간에는 귀가 커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불행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내가 내게로 불려와 무릎을 꿇는 밤에는 순리(順理)처럼 무책임한 단어가 없다 모를 일이지만 그건 꽃들 스스로도 고백할 슬픔이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당신을 생각하면 모래가 씹혔던 것인데 지금의 나는 모래를 먼저 씹는다 입은 귀가 없어서 내 말을 귀담아 듣지 못하고 2. 폭식 후에 구토, 수렴 후의 발산, 코기토 후의 숨, 그리고 마침내 긴 한숨 3. 이제 가끔은 모래를 씹어도 당신이 오지 않는다 슬프지만 어렵지 않다 이 문장은, 무언가 이상한데 모르게 자연스럽다 그저 꽃 질 때까지 봄이 오지 않은 것이라 쓰자 꽃과 봄이 그러하듯 당신과 모래.. 더보기
#054_sketch 살다보니 참 이상한 프로젝트도 하게된다 중국 사람들은 여전히 근세시대의 건축풍을 좋아한다하니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우리 사는 일이 뭐 별거 있나 싶다가도 내가 살아가는 이 일상이 이렇게나 초라하게 저물어도 되겠나 싶고 그 중에서도 참 부질없이 지었다 허물고 또 지었다 허무는 시나 건축에 세들어사는 내가 이른 봄처럼 흉흉하다 오늘은 카트에 넣어둔 시집 몇 권과 추리소설 몇 권을 결제하고 저녁에는 지인들을 만나 오랜만에 당구장에도 들러야겠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가고싶은 곳이 있으면 가보자 만나고 싶은 사람은 만나고 보낼 사람은 보내자 더보기
#053_사진 한 장 에멀젼 리프트했던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스캔한다 겨우내 사진을 잊고 살았다 좋은 시들을 읽었지만 곧 잊어버렸다 봄인가 봄엔 당신 마음도 좀 누그러지려나 사랑이 이 지구에서 그래도 가치가 좀 있다치면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걸 자꾸 잊는다 불변과 가변 사이 내가 늙는다 더보기
#052_반전의 시선 [천서봉] 고갈비 굽는 저녁 죽음이, 이렇게나 달다니. 그러나 이 저녁은 생선의 것도 내 것도 아니다 # 한 사석에서 정진규 시인은 “현재의 나의 시에 끝없이 의문을 갖는다”라는 말을 하면서 자기 점검의 필요성을 피력한 바 있다. 그 자리에서 고희를 넘긴 원로시인이 시적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나이 들수록 시가 깊고 원융해지기 위해서는 냉철한 성찰과 엄정한 자기 판단이 중요하다. 대개 일정한 위치에 이른 시인들이 조로하여 동어반복을 일삼거나 자기 세계에 안주하여 갱신의 노력을 하지 않고 더 이상의 변화를 보여주지 못할 때 독자는 눈을 돌리게 된다. 한때의 명망에 눈이 멀어 자기 작품이 최고인 줄 아는 착각 속에서 시는 퇴기처럼 비루해지고 한 순간에 98년 정도 퇴보하는 것이다.. 더보기
#051_가갸거겨 * (현대시 2012년 3월호) 라고 말한 송종원 평론가의 말은 슬프다 이 말은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가에게 위로가 되기에 충분하지만 그럼에도 슬프다 새로움이라는 것이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가 없어서 슬프다는 말이 아니다 그 뒤에 남겨진 몫이, 글쓰기에서의 새로움을 판단하기 위한 담론의 형성과 그 힘든 혼돈의 과정만이 '새로움을 생산할 동력'이 될 것이라는 그 뒤의 몫이 마음 짠해서다 * 그 말은 담론을 형성하는 평론가의 자세를 제시하는 것으로 읽히기도해서 한편 작가를 위로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기에 더더욱 슬프다 작가의 내부에서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담론이 형성되고 사라지고 씌어졌다 지워진다 '나는 무엇이 새로운가' 라는 물음을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하지 않는 작가가 과연 있을까 .. 더보기
#050_[천서봉]과잉들 [천서봉]과잉들 그해 겨울엔 속죄하듯 폭설 내렸고 별처럼 나는 여러 번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밤거리, 고깔모자의 가로등을 쓰고 걷다가 어느새 내가 어두워졌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평생 미안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그때마다 한 겹의 옷을 더 껴입었던 셈입니다 하루는 따뜻한 걱정들을 불러다 거한 저녁을 먹이느라 나는 한 숟가락도 뜨지 못했습니다 길을 잃은 문자들을 수소문하다가 내 마음에도 골목의 무늬 같은 더딘 손금이 여럿 생겼습니다 웃을 때도 울 때도 항상 곁에 살던 수많은 엄마들, 엄마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랑그인 적 없었습니다 망상과 식욕 사이 봄비가 붐빕니다 참 많은 당신인 것을 알겠습니다 아픔이 몰라볼 만큼 나는 살찌겠습니다 몸이 되기를 거부하는 거대한 결핍으로, 당신이 의식하지 않는 소.. 더보기
#049_서봉氏의 가방 [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서봉氏의 가방 집어넣을 수 없는 것을 넣어야 한다, 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거리는 더 커다란 가방을 사주거나 사물을 차곡차곡 접어 넣는 인내를 가르쳤으나 바람이 불 때마다 기억은 집을 놓치고 어느 날, 가방을 뒤집어보면 낡은 공허가 쏟아져, 서봉氏는 잔돌처럼 쓸쓸해졌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 가령 흐르는 물이나 한 떼의 구름 따위, 망상에 가득 찬 머리통을 담을 수 있는, 그러니까 서봉氏와 서봉氏의 바깥으로 규정된 실체를 통째로 넣고 다닐 만한 가방을 사러 다녔지만 노을 밑에 진열된 햇살은 너무 구체적이고 한정된 연민을 담아 팔고 있었다. 넣을 수 없는 것을 휴대하려는 관념과 이미 오래 전에 분실된 시간 거기, 서봉氏의 쓸쓸한 가죽 가방이 있다. 오래 노출된 서봉氏는 풍화되.. 더보기
#048_가끔 읽어주렴 Ⓒ이희철 ■ 내가 사랑하는 글의 네 가지 유형 -솔직하거나 -미쳐있거나 -자유롭거나 -비어있거나 ■ 내가 경계하는 글의 네 가지 유형 -고집스럽거나 -따라하거나 -뜨겁거나 -꽉차있거나 서봉씨, 갑자기 생각나서 적어본 거지만 가끔 읽어주렴 우린 늘 우리를 잊어버리니까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변명 같은 건 하지 말기로 해 더보기
#047_[천서봉]발산하는 詩 사진_B동_Ⓒ천서봉 [천서봉]발산하는 詩 무언가 증식한다고 느끼는 밤, 눈 온다 취한 네게 내 손가락을 먹이던 그 밤이다 그것도 나무라고 한꺼번에 새들을 쏘아 올리던 자잘한 나의 계통수 소문*이 아니라면 설명할 길 없는 우리, 우리는 작은 점 하나에서 장히 왔다 여기까지 그리고 아픈 남자만 사랑하던 여자의, 그 남자들 여자가 아껴먹던 저녁의 국수들 혼종을 발음하면 따라오는 죽이나 밥 불어나던 다중의 의태들, 웃으면서 너는 운다 낭인(浪人)이 점괘를 쥐여 주고 떠난 일요일 오후 슬픔이 점령하는 작고 귀여운 너의 식민지 * 어쩌면 이 시와 당신은 무한히 번식할 것만 같다. 잠에서 잠으로만 옮겨가는 어떤 병처럼 음계에서 음계로 넘어가는 집시처럼 감염되고 중독되는 감정들은 언제나 나보다 몇 걸음 저 앞에 가있다.. 더보기
#046_[천서봉]너무 오래 사랑하다 [천서봉]너무 오래 사랑하다 夏. 햇볕 속에서 달콤한 복숭아들이 얼굴을 붉혔다. 두꺼운 종이로 겉포장을 해도, 詩集은 금방 티가 났다. 시는 뭣 땀시 쓴댜- 단골 백반 집 아주머니 말 근처에서 몇 번의 사랑이 지나갔다. 거짓말하 던 서정들, 건너 과일가게엔 복숭아들이 허불허불 웃고 있었다. 일 식이었다. 秋. 위통처럼 걸린 장마전선에 며칠을 집에서 뒹굴었다. 수음만으로 도 천장은 배가 불러왔지만 방생한 물고기들은 바다로 가지 못했 다. 숨이 막혔다. 기도와 식도 사이에서, 홈통과 지붕 사이에서, 은 밀한 내통이 울컥거렸다. 매직아이처럼 벽지는 지도를 밀어 올리고 가을의 나무들이 또륵또륵 목구멍 가득 血吐를 내달았다. 冬. 애인은 브래지어 없이 나를 만나러 나왔다. 그녀와 헤어져야겠다 는 생각을 처음 했다.. 더보기
#045_[천서봉]프라하, 사진_Y동_Ⓒ천서봉 [천서봉]프라하, -詩의 나라 독감에 걸린 밤이다 아주 오래전 내가 여기 살았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 확신했다 라디에이터에서는 텅- 텅- 낡은 공기가 연신 주먹질을 해대고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몇 겹의 옷을 껴입고 나는 - 쉴 새 없이 기차들이 중앙역을 나가고 들어왔지만 - 어디로도 떠나지 않는 허름한 양철침대에 누워 詩의 나라로 간다 편안하다 지독하게 편안하여 아프다 이곳이 나의 전생이 아니라면 이국의 먼 눈발에 어찌 몸이 먼저 아프겠는가 모른다 모른다 몰다우, 구눌하게 중얼거리면 내 안에도 깊은 강이 흐르기 시작하고 까를 까르륵, 미친 듯 부르짖는 창밖의 폭설엔 내 깊어진 病이 살갗을 빠져나와 이제 당신마저 임리한데, 조금만 더 떨면 첼로의 커다란 몸처럼 나도 소리를 낼 것만 같은 .. 더보기
#044 #044_담양에서 아내는 내게 너무 초조해하지 말라고 했다, 쓰다가 안 써도 그만인거잖아, 그래, 그렇지, 난 웃고 말았는데... 아마도 시작에 대한 과다한 고민이 겉으로 드러났었던 모양이다 아주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내 오랜 트마우마를 시로 보상받고자 했는지 모른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도, 적어도 시에 대해 초조해한다면 타인에겐 그렇게 비춰질만도 했구나 싶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시를 쓰는 일이 즐겁다 고통스럽고, 힘들고, 뭐 이런 것들은 그냥 시작에 동반하는 당연한 것들이니까 담양에 와서 많은 시를 썼다 물론, 모두 초고이지만... 늘 시작은 그런 거니까 문제는 언제나 시가 아니라 삶인 것이지 그걸 잠시 잊을 때가 있다 내 마음 가장 고독한 곳으로 들어가 보는 일, 거기서 들리는 낮은 목소.. 더보기
#043_[천서봉]나의 늙은 군대는, [천서봉]나의 늙은 군대는, -詩의 나라 나의 늙은 군대는, 사람들 가끔씩 올려다보는 저녁의 추억, 그 추억을 일시에 점령하는 붉은 구름의 영혼 같은 거 착한 상인들을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저녁의 셔터음처럼 드르르륵 발사되는 단호한 외침 같은 거 나의 군대는, 수명을 모르는 빈 마당의 촉수 낮은 전구와 그 전구가 지배하는 평상의 낡은 네모와 네모가 만들어내는 엄격한 그림자에 놀라 커엉컹 짓는 개 한 마리, 누렁이가 지키는 놋쇠그릇의 둥근 상처 같은 거 후회스러운 것은 때때로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거 점호 나팔 혹은 그 소리를 닮은 노트에 적힌 긴 주어들을 자꾸만 잃어버렸으므로, 달큰한 잠이 조금씩 회군하던 내 머릿속 위태한 연안으로부터의 어떤 망명- 그리하여 홀로 남겨진 외로운 抒情의 가치가 시월의 빽빽.. 더보기
#042_[이성렬]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 [이성렬]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 원하지 않는 여행을 나는 떠나 왔다 길 뒤편으로 바람이 기차 바퀴를 굴리고 있었다 건축업자들은 카페에서 내일 지을 집을 얘기했지만 내 수첩에는 아무 일정도 적혀 있지 않았다 집 기둥 사이에 몇 명의 노예들이 누워 있었다 텅 빈 공원의 자작나무를 부둥켜안고 있는 딱정벌레 한 마리 어디선가 익숙한 몸짓으로 고양이가 지나갔다 그러나 나는 幼年에 대한 시를 쓰지 못한다 길 표지판들은 자꾸 돌아서며 허튼 약속을 하지 않았다 그날, S. Beckett의 깊게 패인 얼굴도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다 이성렬 ㅣ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 ㅣ 모아드림 [단상] 언젠가 어떤 시인의 출판기념회에서 이성렬 시인을 만난적이 있다. 그는, 펴낸 첫시집 만큼이나 깊은 눈매를 지니고 있었.. 더보기
#041 #041_방과후 미술실 최소한 시집 안에, 내 아이에게 남겨줄 하나의 메시지는 넣어야 겠는데 구상만 있고, 도무지 구체적으로 잡히질 않는다 시집이 늦어 지는 이유에 대하여 문학동네를 탓할 것도 아니고, K시인을 탓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털고 다시 시작하지 못하는 지금의 내가 참 무기력하고 안타깝다 와중에 회사가 재편되고 있다 칩거 중에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참 고역이다 즐겁지 않는 나를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는 것, 나의 기운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진다는 것 그걸 피하고 싶어서 참 이렇게 혼자 버텨보지만 힘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빈 교정에서 한 아이가 홀로 그림을 그리는 그런 장면 그걸 방과후 미술실이라 하면 어떨까 작은 도화지가 모자라, 큰 운동장을 도화지 삼아 그리는 그림, 생각보다 더 .. 더보기
#040 #040_무제 언제 지날까 싶었던 6주가 모두 지나갔다 한 순간이라도 외롭지 않았다면 그게 나였을까 싶다 더보기
#039 #039_목요일쯤 만납시다 목요일쯤 만납시다 수요일은 조금 이르고 금요일은 너무 늦고 수요일은 너무 어리고 금요일은 우리가, 우리가 너무 늙어있을터이니 목요일쯤 만나기로 합시다 수요일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고 일요일까지 있을 이야기를 또 넉넉히 나눌 수 있게, 반쯤은 버리고 또 반쯤은 남겨둘 수 있게, 그렇게 목요일쯤 만납시다 사람이 아니었거나 혹은 사랑이 아니었거나 그러나 앞으로는 사람이거나 혹은 사랑이어도 괜찮을 그런 목요일쯤 만납시다. 분명한 개념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 그것이 진짜다 이제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셔터는 누르지 않기로 한다.  더보기
#038 #038_콘탁스클럽 콘탁스 클럽에 들렀는데, 사진이 메인에 올라있었다 사실 어딘가 적을 두는 것도 싫어하고, 거기 오래 머무는 것도 좋아하지 않지만 보기 불편한 사진은 아니라고 사람들이 말해주고 있는 거니까 기분 좋은 일이다 실은 보기 불편한 사진을 찍어야한다, 보기 불편하다는 건, 생각하게 만드는 사진이어야 한다는 거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사진이다. 더보기
#037 #037_사물 가끔씩 이런 생각한다 내가 물건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이 나를 선택한 것인지 모른다는... 그래서 인연이란 것이 사람과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닌것 같다는, 어쩌면 조금은 무서운 이야기일 수도 있는. 더보기
#036 #036_사진 아마도 저 사진이 수 년전 내 롤플의 첫 롤이었지싶다 폐가의 어느 방에 내리 비치던 햇살, 그러나 저 때만해도, 사진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그냥 찍고 싶은 것을 찍으면 되고, 못찍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러던 사진에 대한 나의 생각이 어느 날에서부턴가 도드라져서 나는 왜 이렇게 사진을 못찍는가, 부터 시작해서 그 사실이 점점 부끄러워지고, 화가 나고, 마치 시를 습작하던 시절처럼, 사진에 대한 욕심이 커지게 되었는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의 사진은 초보에 불과하다 즐거운 초보... 마음을 찍지 못하고 몸을 찍는, 순간을 찍지 못하고 그저 움직임을 찍는, 그건 여전히 내 감성이 모자라서라 나는 생각한다 같은 카메라로 같은 장면을 찍어도 백이면 백, 찍는 사람에 따라 다른 사진이.. 더보기
#035 #035_글이라는 것 시인 L씨의 새로나온 두 번째 시집을 읽다가... 실망스러웠다 사실, 꾸준히 자신의 글을 써내는 그가 괜찮아보였고 그래서 두 번째 시집도 구입하게 된 것이지만 가슴으로 쓴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말들을 뒤틀어볼것인가에 대하여만 생각하는 시인의 집착만 느껴졌다 시는 없고, 평론을 의식한 시인의 의도만 가득한 책 짜증스러웠다 솔직히, 그 짜증은 시집을 향한 것만은 아니어서 같이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나도 누군가에게 그러하지 않겠느냐는... 자책과 실망감, 그런 복잡한 마음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내 마음과 뒤섞여서 더 괴로운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의도하는 것과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 그 사이에서 나도 방황중이니까. 소위 엘.. 더보기